나의 이력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스승 장기려 교수,

이찬범 교수와 이영린 서울 적십자병원 외과 과장,

또 이영균 교수에 관하여






1961년 졸업생 崔至源

나의 아버지, 崔允梧


나는 1937년 1월 25일, 강원도 회양군(금강산은 회양군, 통천군, 고성군 3개에 걸쳐있다.) 난곡면에 위치한 이왕직 (李王職) 목장의 공의 (公醫)로 일하시던 부친 崔允梧 (최윤오) 집사와 모친 金明洙 (김명수) 권사 사이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집안의 뿌리는 평북 선천이며, 부친의 형제는 육형제였다. 경성 (옛 서울)에서 순사 (경찰관)로 있던 둘째 숙부님이 동생 중 제일 똑똑한 다섯째 숙부 최윤식 (나중에 서울 문리대 학장 겸 수학과 과장)을 서울로 불러 올려 경기중에 입학시켰다. 윤식 숙부님은 공부를 잘 하여 일등으로 졸업하고, 경기중 선생님들의 권유로 히로시마 고등사범에 진학한 결과 또 일등으로 입학하여 일등으로 졸업하셨다.


윤식 숙부님은 고등사범 선생님들의 권유로 동경제대에 입학하여 다니실 때 여섯째 동생인 내 부친이 생각나서 당시 선천 신성중학교에 다니시던 부친을 동경으로 부르셨다. 부친은 성성 중학교에 다니면서 신문배달을 하면서 고학을 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공부하지 못해 귀국 후 경성제대 의학부에 시험을 쳤으나 그만 낙방을 하시어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하셨다. 1933년에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시고 강릉도립병원 외과와 응급실에서 3년간 일하시면서 많은 외과 경험을 쌓으신 후 강원도 회양군의 이왕직 목장에 공의로 취직하였다. 이곳에서 많은 일반 환자를 진료하였고, 특히 부인과 경험을 많이 쌓으셨다고 한다.


부친은 그 당시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제국대학 이와이 내과 과장에게 편지를 보내 수습의사 (인턴, 전공의)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이와이 교수께서 흔쾌히 오라고 하여 부친은 제국대학 병원 내과의 전종휘 (나중에 전염병내과 과장), 김경식 (호흡기내과 과장), 한심석 (나중에 소화기내과 과장, 서울대 총장) 선생님들과 같이 내과학을 배우면서 굉장한 교분을 쌓으셨다.


이후 철원 철도병원에 자리가 비어서 신청을 하였는데, 원래 철도청에서 조선사람은 자리를 잘 안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은 강릉도립병원에서 외과 경력을 쌓았고, 이왕직 목장 공의로 일하면서 말하자면 family medicine (가정의)를 하셨고,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유명한 이와이 선생 밑에 정식으로 내과 수련을 받은 경력 때문에 풍부한 경험이 인정되어 당장 취직되었다. 철원 철도병원은 의정부, 동두천, 연천, 철원을 포함하여 월정리, 복개, 평강, 신고산 등의 역을 모두 관내로 하여 진료지역이 넓었다.


철원에서의 어린 시절


부친은 개업을 하시면서 불쌍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하셨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철원역 가까이에 있는 병원과 넓은 사택, 뒷마당의 큰 연못이 기억에 생생하다. 부친은 우리 형제가 칠남매가 되니까 뒷연못이 아이들에게 위험하다고 하여 메워 버리셨다.


나와 누님 (崔至溫 최지온: 나중에 서울여의대인 우석대학 졸업)은 각각 4살, 5살 때 송서방이 끄는 인력거를 함께 타고 2년 동안 철원감리교회 유치원에 다녔다. 철원감리교회는 1933년에 세워졌으며 서울 종로구 화신백화점 뒤에 있는 태화관 건물과 똑같다고 한다. 그러나, 6.25 전쟁 후 다 파괴되어 지금은 머릿돌에 1933년 초석이란 돌만 뒹굴고 건물 전체는 간 곳이 없이 되고 말았다. 유치원에 올라가는 길은 옆으로 나 있는데 전쟁 후에 그곳까지 아스팔트를 깔아놓아 내가 다니던 인력거 자리를 배려한 1930년대를 생각하게 된다. 비록 일제 탄압시대였지만 유치원이 좋은 교육 기관이었고, 부친이 풍금 등 많은 교회비품 등을 기증하셨으므로 교회에서 크게 배려하여 인력거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준 것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


부친은 금강산 가는 경성전기회사의 촉탁의도 하고 계셨기 때문에 조선의 모든 철도를 이용할 수 있는 2등 무료 패스권을 가지고 계셨다. 난 5형제들과 함께 봄, 여름, 가을, 겨울, 일년 사계절을 금강산 입구의 장안사까지 가는 전철 2등칸을 타고 다녔으므로 나만큼 금강산 구석구석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고 자부한다.


부친은 철원역 부근과 625 백마고지 옆산 등 토지 약 10만평을 소유하고 있어 철원의 큰 갑부 중 한 분이었다. 8.15 해방 전 쌀이 굉장히 귀할 때도 우리 병원 약제실 밑에 뚜껑을 열고 들어가면 정미해놓은 쌀이 적어도 200-300 가마니 있었다. 윤일선 총장, 윤식 숙부, 사촌 지철, 지훈, 사촌 누님 지향 등이 금강산 나들이를 자주 오셨는데, 가실 때는 배낭에 쌀을 가득 담아 가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8.15 해방 후 철원이 38선 이북이 되어 북한 공산당 정권이 땅을 5정보 (15,000평) 이상 가진 지주들은 다 내쫓았다. 그때 농토를 다 빼앗겼지만 어머니께서 문서를 배에 차고 월남하셔서 나중에 DMZ 남쪽에 있는 농토를 많이 찾았다. 2008년 5월 1일 어머님의 유언에 따라 10만평 농토를 인천내리교회에 원산 최윤오 기념교회, 무료진료소, 사랑의 집짓기를 하는 조건으로 전부 헌납하였다.


1967년 육군 군의관으로 8사단에 있을 때 전방 6사단과 군단 CPX에서 교체 훈련을 받을 때마다 철원 고향땅을 멀리서 바라보곤 옛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다.


나의 의대생활, 진료봉사의 시작


1955년 나는 서울고를 졸업하고 문리대 의예과에 진학했다. 그 당시부터 요한복음 12장 24절 ‘주님께서 내가 너희들에게 진실로, 진실로 말하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희생치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묻혀 희생하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 내 인생을 잡아 흔들어 놓았다. 둘째 사촌형이신 최지훈 (문리대 수학과 출신 과장) 교수는 우리들 예과 때 추계학을 가르쳤다.


내가 의대 본과에 진학했을 때 김인달 교수님께서 崔至喆 (최지철)과의 관계를 물으셨다. 윤식 숙부의 아들인 사촌형 지철은 경기중 4학년에 구주제대에 다니시다 해방 전에 서울의대에 진학하여 내내 일등을 하시고 서울대학병원 정신과 강사로 계시다 6.25때 납북되어 소식이 끊겼다. 내가 지철 형님의 사촌이라고 대답했더니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자기 기억에 없었다.”고 하셨고, 심보성 신경외과 과장도 “참 똑똑한 분이었다.”고 하셨다.


부친께서는 8.15 해방 전 철원 철도병원장 당시 첫째 숙부님의 장남인 최지현을 중학교 졸업 후 데려다 의학을 가르쳐서 한지 의사면허를 받게 하여 철원 철도병원을 맡겼었다. 그 사촌형이 6.25 이후 흑석동에서 개업해 부친과 윤식 숙부님이 약주를 드시려고 한강 인도교를 지나 흑석동에 자주 들리셨다.


그런데 9.28 수복 후 한강 백사장 인도교 밑에 천막촌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한강 백사장에 사는 2만여 명의 사람들을 누구도 돌봐주지 않았다. 1956년 예과 2학년이었던 나는 노량진 전차를 타고 한강 인도교 바로 직전 역에서 내려 한강 백사장 천막촌에 가보았다. 그곳에는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약 4천세대가 가마니를 밑에 깔고 옆과 위에는 천막을 둘러 지내면서 19공탄을 사용해서 조석으로 끼니를 잇고 있는 상태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나는 부친에게 말씀드려 집에 있는 약품들을 얻고 가정교사로 번 돈으로 마련한 구급약을 가지고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에 동기 차철준 (후에 Loma Linda Hospital의 신생아학과 과장), 장가용 (후에 서울의대 해부학 교수)을 비롯한 밀알모임 친구들과 함께 봉사하였다. 또 애인 친구 (장의옥 연세대), 이화여대 약학과 안성희, 이대숙, 차의화, 간호과 방옥순 등이 서로 도와서 교대로 봉사했으며, 서울대 법대 이흥근, 한덕수, 문리대 정치과 이덕주, 수학과 최영호, 사범대 오창원, 공대 박상표, 안 문, 홍익대 김해식, 연세대 한흥수 등 형제들이 교대로 수고해주었다. 부친께서는 과거 철원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를 하셨기에 혹시 우리들이 실수할까봐 후견인으로 봉사활동을 지원해주셨다. 주로 감기, 설사, 연탄중독, 피부질환, 위생불량 등 여러 질병을 무료로 보아 드렸다. 나는 매주 그 곳을 다니느라 학교 공부는 재시험을 면할 정도였지만 6년 동안 재시험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1958년 큰 수해가 나서 한강 수위가 높아져 천막이 통째로 다 떠내려가 버렸다.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응암동 산기슭에 천막을 쳐주어 모두 그곳으로 옮겨갔고, 우리도 그곳에 따라가서 무료진료를 계속 했다. 그 당시에는 예방의학 허정 선생님이 후견인이 되었다.


부친은 철원 땅을 일부 찾아서 농사를 지으시면서 그곳에서도 약간의 개업을 하시고, 내 여동생은 서울대에 낙방하여 부친을 도우면서 재시험을 준비하여 이듬해 서울 사범대학교 영어과에 무난히 진학했다. 그런데 내가 학부 1학년 겨울방학 때 부친께서 뇌졸중으로 우측 반신마비가 와서 나는 철원에 내려가 버스를 대절하여 모시고 올라왔다. 그때부터 내가 대진을 하여 가장 힘든 606호 매독주사도 직접 놓고 웬만한 상처도 수술하였다. 나는 이때부터 외과를 지망하고 있었다. 다행이도 나의 부친은 그 후 회복되시어 영등포시립병원 내과 과장으로 수년을 계시다 은퇴하셨다. 그 당시 내과 과장으로 계시며 천막촌 환자들을 영등포시립병원에 입원시키고 돌봐주셨다.


한강 인도교 수재가 난 이후 광나루 다리 (천호동) 밑에도 약 580세대 2500여명의 천막촌이 형성되어 그곳에서도 진료봉사하게 되었다. 의대 3학년이었던 나는 그 다리를 지나 광주군 국회의원이며 내무부 장관이었던 최인규씨를 만나러 을지로 입구 내무부 청사에 갔다. 물론 의대 3학년 학생이 장관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비서관들이 참 좋은 일 한다고 하며, 동아, 중외, 한독 등 서울 시내 여러 제약회사에 약품 선처 부탁전화를 해주어 많은 약품 등을 제공받아 의료봉사에 힘이 되었다. 그 당시 의대 동창회장을 지내신 동아제약 강신호 회장님의 부친되시는 강사장도 만난 기억이 난다.


수련생활: 이찬범 교수와의 만남


1961년 서울의대를 졸업한 후 흉부외과에 마음을 두어 흉부외과 과장이었던 이찬범 교수를 자주 만나 보았다. 이찬범 교수는 내 외숙부이신 김석원, 노병호 교수 등과 신의주 동중 동기동창이었다. 나는 노병호 교수방이 조용하여 의대 재학 중엔 그 방에서 공부를 많이 했는데, 그 방을 노크하신 내과 교수님들은 내가 내과를 전공하지 않나 생각하셨지만 사실 나는 외과에 마음이 있었다.


이찬범 교수께서는 호흡기 내과 과장인 김경식 교수가 약물치료만 고집하고, 심지어 폐엽절제술 (segmental lobectomy)을 해야 될 폐결핵 환자도 잘 넘겨주지 않으므로 나를 서울적십자병원에 수련생으로 가도록 독려하였다. 또 자기 동기인 성대 의학부생인 이영린 대위가 제대하여 적십자병원 외과를 맡아서 가게 되니 많은 외과 기술과 학문을 겸하여 지독하게 가르칠 것이라고 하여 나는 서울적십자병원에 가게 되었다.


나는 진병호 교수의 석사 논문 (‘급성충수염 수술 전후에 전해질 변동에 관하여’) 때문에 급성충수염 환자들에서 수술 전후에 피를 뽑아 전해질을 측정하기 위해 서울대학병원 병리검사실을 자주 다녔다. 처음에는 시설 부족으로 거의 반년은 전해질 측정이 힘들었지만 백승룡 선생님이 병리검사실장으로 오신 후 완벽한 시설을 갖추게 되어 약 1,000예에 대해서 병리조직 검사, 전해질 검사를 하여 논문을 직접 작성할 수 있었다.


졸업 후 병원 당직이 아닐 때에는 마포국민학교에서 무료진료를 계속 했다. 그 당시 팔로사징후 (Tetralogy of Fallot)로 폐고혈압을 수반한 심실중격 결손 때문에 청색증을 동반하고 숨이 차서 계단도 잘못 올라가는 7세 여아를 서울대 홍창의, 이영균 교수에게 데리고 간 적이 있다. 이영균 교수는 한국 최초로 여아를 마취하고 얼음물에 담갔다가 심장 개흉수술을 하였고, 그 당시 한국일보에 대서특필 되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애석하게도 폐부종이 와서 사망하였다. 한국 최초로 심장 개흉술을 실시하신 이영균 교수께서는 그 후에 많은 노력을 하여 여러 증례를 성공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박사논문으로 ‘동종 가토 기관이식에 관한 실험적 연구’를 하게 되었는데 토끼를 약 200마리를 기르면서 논문을 써서 이찬범 교수댁에 찾아가서 드렸다. 그러나 이찬범 교수가 간암으로 세상을 뜨시게 되어 이영균 교수께서 대신 감수해주셔서 대한외과기관지 1968년 1월호에 실었다. 이 실험의 병리소견들은 김용일 교수께서 많은 조언을 해주셨으므로 이 지상을 통하여 감사 말씀을 전한다.


이찬범 교수님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한국 최고 갑부인 이병철씨가 하지에 불치의 피부병이 발생하여 여러 피부과에 갔으나 못 고치고 일본 동경의 여러 병원에도 가봤지만 치료가 안 되어 고생했다. 이찬범 교수께서 인천도립병원 김영언 원장 (성대 10회 1939년졸)의 소개로 이 회장을 치료하게 되었는데 병소 피부를 전부 긁어낸 후 피부이식을 하였다. 그리고 고단위 단백질주사 (albumin)를 구해오라고 하여 미국에서 수입한 단백질을 계속 주입하여 깨끗하게 치료하였다. 그런데 이찬범 교수께서 수술비를 받지 않으셔서 이 회장이 장충동 집을 제공하여 효자동 조그만 집에서 장충동 집으로 옮겨 두 딸과 함께 넓은 곳에서 사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영린 서울적십자병원 외과 과장


이찬범 교수는 육군에 계실 때 마산 육군병원 외과부장으로 폐결핵 환자의 폐절제술 등 많은 경험을 쌓으셔서 그 당시 흉부외과의 원조가 되셨다. 이때 경성제국대학 동기생으로 6.25 사변 중 평양고보 4학년 때 성대에 입학하시고, 경성제국대학 외과에서 같이 경험을 쌓았던 이영린 인민군 대위를 만나게 되어 수술에 더욱 박차를 가하시게 되었다.


이영린 박사는 8.15 해방 전 일본인 외과 교수가 외과수련을 잘 받았으니 고향에 돌아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많이 살리라고 하여 고향에서 개업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쟁준비를 하고 있던 북한 인민군에 잡혀서 남하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이 박사는 포로수용소 안에 미군 후송병원이 생겨서 그곳에서 인민군들을 치료하던 중 북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군에 지원하였고, 육군 대위로 진급한 후 만년 대위로 마산육군병원에서 동기생인 이찬범 중령을 도와 흉부외과에 기여하였다. 그 이후 이영린 대위는 수도육군병원에 계시면서 후배 군의관 김진복, 김은섭, 심영보군 등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나는 이영린 대위가 전역 후 서울적십자병원 송호성 원장의 권유로 외과 과장으로 근무하시던 시절에 수제자가 되었다. 나는 약 2년 동안의 수련의 시절에 위절제술, 담낭 적출술, 경부근치수술 (radical neck disection), 갑상선절제술, Wheeple op. 등 모든 어려운 수술 기법들을 익힐 수 있었다.


이영린 과장은 매일 아침 4시에 동대문에서 서대문 적십자병원으로 출근하시는데, 내가 항상 약수동에서 합승하여 모시고 출근하였다. 이영린 과장은 환자 회진 후 일반외과 수련의들을 의국에 모아놓고 “Christopher Textbook of Surgery", "Mosby Textbook of Surgery", "Pathophysiology in Surgery"를 3 페이지씩 나누어 30분씩 강의시키고 시험문제를 두 문제씩 내게 하였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30분씩 각각 강의하고 36문제가 되면 월요일 아침에는 더 일찍 모이게 하여 구술시험을 보아 만약 대답 못하면 굉장히 힐책을 하시며 가만두지 않으셨다. 많은 증례를 모아서 외과 집담회에 보고하게 하여 수련의들은 다른 대학보다 더 많은 경험과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그 결과로 내가 1966년에 외과 전문의 시험에 일등을 하였고 정희섭 보사부장관으로부터 전문의 자격증을 1호로 받았다 (1967년 10월 1일 보사자 전문의 자격증 1호).


그 당시 송호성 원장이 인천적십자결핵요양소장을 겸하면서 부평 121 미군병원 원장, 외과부장 등 미육군 중령, 대령과도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 흉부외과와 우리 병원이 매주 화, 목요일에 주 2회 공동수술을 하였다. 덕분에 나는 미국 병원의 수련의 과정도 익힐 수 있었다.


나는 수련의 시절 대전적십자병원에 파견되어 선호영 선배의 조수로 일하면서 독일식 정형외과 수술 방법을 6개월간 익혔다. 상경해서는 그 당시 서울적십자병원에 처음으로 정형외과가 독립되어 한두진 과장으로부터 6개월간 미국식 정형외과 수련을 받을 수 있었던 좋은 경험도 했다.


적십자병원에서 수련받던 시절의 에피소드로 기억나는 것은 서울대학병원 병상일지 0001호 환자였던 장치영씨가 결핵류 (tuberculous fistula) 약물치료를 수년간 받다가 적십자병원으로 옮겨 와서 Geiger 외과부장이 같이 수술했던 일이다. 늑골 2개를 잘라내어 fistula 구멍을 거의 좁혔고, 퇴원 후 개인적으로 돈암동의 그분 댁을 방문하여 완치시킨 기억이 새롭다.


군의관 생활


외과수련이 끝나는 1966년에 부친께서 돌아가셔서 가사 정리 차 군입대를 일 년 연기하였다. 1966년 일 년 동안 영락교회 앞 김순영 병원에서 외과환자들을 치료하던 중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친구 장로가 급성 충수염으로 수술받고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장로께서 심방 오신 한경직 목사님에게 나를 집사로 추천하여 젊은 나이에 영락교회 집사로 봉사하게 되었다. 약 3년 동안 서울고 영어 선생님이셨던 정치근 선생님과 아침 7시 예배에 맨 앞줄에 앉아서 예배하고, 같이 헌금위원을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1967년 군에 입대하여 1968년에 대전 63육군병원에서 외과 과장과 비뇨기과 과장을 겸직하면서 방광경 검사 경험을 많이 쌓았다. 사실 일반외과, 흉부외과, 정형외과 (미국식, 독일식)를 수련했으므로 비뇨기과 수술은 문제가 안 되었다. 그 당시 원남에서 결핵성 신장염으로 한쪽 신장이 전부 파괴된 상사 출신 노병들이 많이 후송되어 왔었는데 서울대학교 동문 출신인 문상규 대위를 수술 조수로 하여 한쪽 신장을 적출한 후 제대시킨 기억이 새롭다. 하루는 당시 원장이었던 세브란스 출신 이규동 대령이 나를 부르더니 병원 근처 사는 남자아이의 방광에 작은 계란만한 결석이 발생하여 방광 입구를 막고 있으니 수술해 줄 수 있냐고 해서 후배인 정형외과 문상규 대위와 같이 개복하여 돌을 꺼낸 적도 있다.


그 해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지령으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다가 일망타진되고, 한 명 (김신조)이 생포된 소위 김신조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규동 대령은 아침에 사병들에게 모래주머니를 채워 구보를 시켰고, 군의관과 의정장교들은 매일 집무 후 축구시합을 하게 하였다. 시합 후 진 편이 대전시장 안 복국 집에서 복국을 사서 같이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1968년에는 포천에서 무덕고개 하나만 넘으면 위치한 전방 8사단 10연대의 의무중대에서 중대장으로 초급지휘관을 지냈다. 당시 8사단은 후방사단으로 최전방 6사단을 지원하고, 적의 전차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돌들을 군데군데 쌓는 일이 주 업무였다. 의무중대에는 약 30명의 병사, 행정장교와 선임하사가 있었고, 구급차 1대와 피카 짚차 여러 대가 있었다.


그때 나는 배짱 좋게 영구 막사를 뜯어서 수술실, 약제실, 대기진료실 등을 만들었다. 비용은 의무중대원들과 같이 연대에서 시화전을 하고, 그 작품을 구급차에 전부 싣고  마치 응급환자를 수도육군병원에 후송하는 것같이 속여서 6군단 헌병 초소를 지나 부자 여성들이 모이는 서울 SOROPTIST에 전시하여 다 팔아 충당하였다. 이 시설로 급성충수염 수술도 한 적이 있고 연대 내에서 발생한 모든 안전사고 환자를 후송하지 않고 적절한 치료를 하여 원대 복귀시켰다. 그 덕에 나는 영구막사를 변경했다고 야단맞지 않고 사단장 황석주 소장의 표창장까지 받았다. 연대장이었던 배성순 대령은 지휘력을 인정받아 소장까지 진급한 후 제대하셨고, 농협의 이사가 되어 후일 철원의 땅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것은 미 7사단 군의관들 부부를 초대하여 연대 식당에서 불고기, 잡채, 전 등 한국식으로 점심을 대접하고, 불춤을 잘하는 위생병으로 하여금 불을 토하는 요술 등을 보여 주었더니 매우 좋아했었던 일이다.


나는 일년간 사단생활을 마치고 육군 소령으로 진급하여 원주 1군사령부 (1군 사령관 한신 장군) 밑에 위치한 제51후송병원에 전속되어 외과부장 겸 외래 과장 두 보직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원주의 각 기관 즉, 범죄수사대, 중앙정보부, 방첩수사대 등에서 가짜 입원청탁이 많이 들어와 외래과 선임하사를 괴롭혔다. 나는 당시 작전참모였던 서울고 1회 선배인 한민석 준장을 관사로 찾아가 헬리콥터로 매일 사단, 군단, 전방을 방문하시면 작전 참모의 7호차를 내 방 앞에 좀 여러 날 세워 놨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외래과 선임하사에게 “우리 과장 최 소령은 일군 작전참모, 사령관 직속이니 작전 검열받지 않도록 조심하고, 만약 거기에서 견책 받으면 진급도 못하고 군대에서 쫓겨난다.”고 하라고 시켰더니, 1968년 7월부터 1969년 6월 제대할 때까지 조용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 당시 각 과마다 전부 전문의가 배치되어 환자를 후방으로 후송하지 않고 수술 후 육본 의무관실 의무 과장과 심사하여 현지제대를 시켜 비용을 절감하였다. 또 강원도 내 여러 군 장정 신체검사를 맡아서 군입대전 신체검사를 주 2회 실시했다. 첫날 흉부X선 촬영으로 결핵여부를 판정하고 다음날 X선을 보면서 신체검사결과를 판정하였는데, 전문 군의관들이 신체검사를 공정하게 실시하여 부정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에 무사히 일 년을 마치고 6월 30일부로 제대하였다.


사모아에서의 진료생활


1970년 1월 2일 오정근 수산청장의 간청으로 일본 선원 1000명, 한국 선원 3000여명, 중국 선원 3000명을 돌보기 위해 하와이를 거쳐 PagoPago 미국령 사모아로 갔다. 그당시 우리나라는 남태평양 사모아에 원양어업을 하여 달러 획득에 기를 쓰던 시절이었다. 사모아의 John Haydon 총독이 “왜 한국인은 의료활동을 잘못해 선원들을 사망하게 하느냐. 전문의를 데려오라.”고 하여 오 청장이 미국식, 독일식 정형외과와 비뇨기과 경험을 쌓은 외과전문의 자격증 1호 소지자인 나를 적임자로 적극 추천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의사는 이미 떠났고, 중국의사는 외과 경험이 전혀 없어 중국 선원들도 전부 내가 수술하였다. 5년 동안 Lyndon B. Johnson Tropical Medical Center에서 2000례 이상 되는 많은 수술을 했지만 장기려 박사의 권유대로 반드시 수술 전 기도를 하고 시술해서 그런지 한 번도 실수가 없었다.


그 당시 공영토건 회사가 PagoPago 공원 안에 청기와로 Korea House를 지었는데, 이 건물이 크게 돋보여 사모아 상하 양원, 공항 활주로 확장공사, 소방서, 심지어는 공기 채집소 등 거의 모든 공사를 따내어 큰 수익을 올렸다. 그 회사에 나와 있던 박승빈 기사가 영어도 잘하고 성경지식이 풍부하여 Korea House에서 선원들과 같이 드린 주일예배에서 내가 사회를 보고, 박승빈 기사가 Sanderson 목사의 설교를 통역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다.


당시 술 때문에 항상 사고가 발생했는데, 주일에는 Korea House에서 술을 못 팔게 하고 대신 해안가에 나가서 주재원 부인들이 마련한 불고기, 김치로 선원들을 대접하여 주일만은 사고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월요일부터는 또 사고의 연속이었다. 밤 10시쯤 되면 방광파열, 장출혈, 흉복부손상,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사고 때문에 Medical Center 응급실에서 전화가 오곤 했다. 그래도 장기려 박사의 가르침대로 기도하면서 수술을 잘 하였다. 또, 급성백혈병, 70% 3도 화상, 관통성 다발성 복막염, 급성간염 등 사모아에서 치료하기 어려운 5명의 환자를 특별기편으로 각각 세브란스, 성모병원, 서울대병원, Hawaii Queen's Medical Center에 후송했으나 간염환자만 생명을 구했고 나머지 4인은 사망했다. 하지만 지극 정성을 다했기 때문에 아무런 말썽이 없었다. 후송 후 돌아오는 길에 San Francisco나 LA를 거쳐서 내 집인 St. Louis에 가서 어머니와 동생들, 큰아들 최광현을 보고 오곤 했다.


미국병원에서의 수련생활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아 참치 사업은 사양길에 들어섰고, 1975년 10월 후천성 당뇨병이 발생되어 더 이상 일을 못하게 되었다. 나는 St. Louis로 돌아와 Cecil Textbook of Medicine을 처음부터 끝까지 독파했다.


1976년 봄에 E.C.F.M.G (미국의사국시)에 합격하여 다시 인턴십을 하기 위해 뉴욕, 시카고, 볼티모어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면접시험을 보았다. 일반 외과 인턴, 수련의는 오라는 곳이 많았지만 당시 내 나이가 42세여서 외과하기엔 체력이 벅찼다. 그리고 F.L.E.X (Federal License Examination)를 보려면 외과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St. Louis 대학과 제휴된 Deaconess Hospital 내과에서 PGY1, 2, 3 과정을 거쳤다. 그 동안에는 내 아내가 카페테리아를 운영하면서 생활보조를 했다.


그런데 3가지 시험 (기초, 임상, 종합임상, X선, CT scan) 모두 75점 이상을 맞아야 하는데 주마다 요구조건이 달랐다. 코네티컷 주는 2년 수련의 과정을 요구하고 평균 75점 이상이면 되었지만, 뉴욕 주는 3가지 모두 각각 75점 이상을 요구했다. 그래서 우선 코네티컷 주 면허를 따서 개업을 시작하면서 동기생 하상배 교수가 King's County-Downstate에 재활의학과 과장으로 있어 우선 그곳에 적을 두고 재활의학을 2년간 배웠다. 마침 옆에 소련 유태인 Langskoi가 F.L.E.X 준비문제집을 많이 가지고 있어 기초 부분만 5년간 문제집과 답을 복사하여 공부하고 시험을 다시 보았다. 다행히 그 문제집에서 30% 이상이 나와 일사천리로 해답을 쓰고, 모르는 문제만 곰곰이 생각하여 풀었더니 78점이 나와 다시 뉴욕 주에 면허를 신청하여 1982년 10월에 개업을 허가받았다.


장기려 교수와의 인연


장기려 교수는 3, 4학년때 외과학을 가르치셨는데 위암, 위궤양, 간암 등을 강의하셨다. 1963년 서울의대에서 개최된 대한의학협회 학회에서 간은 4개 엽으로 되어 있으므로 암이 발생했을 때 엽절제술 (lobectomy)을 하면 생존률이 높고 항암요법으로 장기생존이 가능하다고 하시며 앞으로 간이식이 가능할 것이라는 획기적인 내용을 발표하셔서 박정희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 논문으로 유럽과 미국학회도 순방했으며 막사이사이 봉사상도 받으셨다. 장기려 교수는 나중에 부산에 내려오시어 복음병원과 부산대학 외과 과장을 맡으셔서 후진양성에 많은 노력을 하셨다.


나는 개인적으로 장기려 교수로부터 많은 사사를 받았으며, 내가 외과를 정진하는데 정신적 지주로 계속 큰 힘이 되어 주셨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결혼을 위해 쌍방 부모간 상견례를 위해 장기려 교수를 초대했을 때이다. 내가 택시로 모시려고 할 때 걸어가자고 하여 종로 대학로를 통해서 쌍림동까지 걸어오시면서 작은 목소리로 은혜스러운 찬송가를 부르셨다. 저녁을 드신 후 “오늘 내가 대접을 잘 받았으니 밥값을 하겠다.”고 하시면서 피아노에 앉아 찬송가를 부르셔서 양쪽 가문에 영광스런 시간이 되었다. 이 모임 후 우리는 약혼하고 1964년 4월 2일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주례로 결혼했다.


친구 차절준군이 군에서 제대하고 California Linda Roma에서 신생아학과 과장으로 오랫동안 있었다. 장기려 교수가 은퇴 후 한국 최초로 의료보험 녹십자 사업을 하셨는데 후원자를 구하기 위해 미국에 두 번 들리신 적이 있다. 그때마다 차군 댁에 묵으셨고, 거마비를 드리면 그때마다 그 돈을 한국 고아들에게 몽땅 주셨는데, 차군은 나중에 그 고아들이 편지를 보내와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차군한테 전화할 때마다 용돈조차도 쓰시지 않고 학생에게 전했다고 하며 감격스러워 했다.


장기려 교수에게도 이찬범 교수와 같은 사례가 있었다. 즉, 효성물산 회장 조홍제씨가 담석증-담낭염으로 백병원에서 수술받았는데 장 교수께서 굳이 수술비를 받지 않으셔서 대신 원남동의 한옥 한 채를 드렸다. 장기려 교수는 이곳에서 지내시다 당뇨병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셨다.


내가 서울 갈 때마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이 옛날 문리대 옆 한식집에 모였는데 장가용군이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곤 하여 장로 아들이 독한 술을 마시느냐고 제발 끊으라고 권유했었다. 그러나 계속 술을 마셔서 후천성 당뇨병이 심해져서 결국은 실명하고 주 3회 신장투석하고 왼쪽 다리까지 절단하는 비참한 상황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차절준군이 명륜동 집을 방문하니 가용군이 손을 붙들고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나는 볼티모어에서 전화하여 신장이식을 빨리 하라고 야단치니 이제는 다 끝났다고 하였다. 참 안타까웠다.


봉사활동


옛날 밀알모임 신앙지도 동지였던 친구 조영준 목사가 Flushing에 굉장히 큰 Flushing 제일교회 담임을 하게 되었는데, 교민 75명과 미국 교인 40명 정도로 신도가 적어 힘든 상황이었다. Flushing만 해도 교포가 3만명이 넘었는데 교포 중 의료보험이 있는 사람은 1%도 채 안 되고 그나마 미국 직장에 다니는 사람뿐이었다. 그곳에 방이 많아 헌 진찰대를 하나 사 넣고, 한국일보에 매주 토요일과 주일 오후에 무료진료를 한다고 광고를 냈다. 내외과를 다 보고 간단한 수술도 해주고 처방을 써주었는데, 전부 무료로 봉사하였다. 믿는 마음으로 성심껏 진료하고 신앙 전도를 해서 그런지 무료진료를 계기로 교회 신도수도 증가하여 뉴욕의 350개 교회 중 4대 교회로 성장했다.


문득 옛날 한강백사장 천막촌 생각이 났다. 내 아내는 연세대 신과대학 출신이고 윤락 여성선도사업 ‘은혜원’에서 13년 경험이 있는 같은 밀알모임 회원이었다. 지도교사였던 정광섭 장로는 장가용 부친인 장기려 교수와 퍽 가깝게 지내 장가용군이 밀알모임에 들어와 같이 의료봉사를 했다. 가장 절친했던 차절준군도 같이 도와서 한강 백사장 천막촌, 응암동, 광나루 다리 밑 등으로 토요일과 주일에 같이 봉사했다.


그러나 교회 신도 수가 3천명으로 늘어나니까 만성 신부전증, 신장염으로 당장 투석이나 이식을 해야 하는 환자가 3명이나 발생했다. 교회 내 6년 후배인 홍준호 신장이식 전문의 (서울의대 외과, 미국 외과)가 같은 구역에 속해서 이식을 부탁했지만 뉴욕 주법이 가족 내만 가능하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할 수 없이 서울에 있는 사랑의 장기기증본부 정근모 이사장 (서울대 입학 동기), 박진탁 목사와 접촉하고, 한양대 강종명 (서울의대 11년 후배) 신장내과 과장과 장기이식에 대하여 상의하였다. 이들의 도움으로 1996년 6월 25일 사랑의 장기기증 뉴욕지부를 결성했고, 이식 가능성 여부를 위해 혈액형, 간염, 결핵검사 결과, 유전인자 DR, DQ 검사 등 모든 검사를 한 후 1996년부터 1999년 내가 은퇴할 때까지 총 16명이 사랑으로 주고받는 장기 (신장) 이식수술을 하였다. 다행스럽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16명 모두 성공적인 장기이식수술을 받았다.


육체적 시련


나는 당뇨병이 심해지면서 심장관상동맥 4개가 막혀서 1999년 6월 30일부로 개업을 그만 두고, 9월 15일 심장혈관우회술을 받았다. 그런데 Long Island Jewish Medical Center 흉부외과 과장의 실수로 지혈을 못한 상태에서 흉관 (chest tube)를 박고 그 다음날 뽑아버리는 바람에 왼쪽 폐에 계속 혈흉이 발생하여 도저히 잠을 잘 수 없고, 매일 숨이 차서 견딜 수 없었다. 병원에 가서 흉부 X-ray를 찍고 매일 1300-2000 cc 씩 뽑아냈지만 견딜 수 없어 결국 수술 10일만에 다시 입원하였다. 다른 의사가 흉부내시경을 해보니 좌측 폐가 주먹만하게 줄어들어 있어 좌측 폐를 다시 팽창시킨 후 흉관 2개를 꽂고, 오른쪽에도 차있는 혈액 1000 cc를 뽑고 흉관을 삽입해 놓았다.


그 후 당뇨병이 심해지면서 당뇨성 말초신경병증 (diabetic peripheral neuropathy), 당뇨성 말초혈관질환이 생겨 다리로 내려가는 혈관들이 막히기 시작하여 잘 걷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사경을 서너 차례 거쳤다. 그때마다 내 처가 기도하면서 전문의와 간호원을 총동원시킨 결과 생명은 유지되었지만 잘 걸을 수가 없었다. 특히 왼쪽 다리가 더 나빠졌다. 장가용군과 똑같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도와 새벽기도회에서 은혜받고, La Guandia Hotel 주치의를 20년 이상 한 인연으로 헬스클럽의 평생회원권을 가지고 있어 새벽 기도 후 2시간 가서 수영장에서 억지로 걷고, 사우나, 더운 욕조에서 계속 자가 물리치료를 했다.


멈출 수 없는 봉사의 길


이 와중에 신장기증자 검사비, 서울 왕복 비행기표 등 관련 비용을 마련하기에 너무 벅차 2000년 사랑의 장기운동도 쉬게 되었다. 그러나 CBMC (기독실업인회)에서 1992년 4월에 시작한 일, 사랑의 장기운동, 사랑의 집짓기 2001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우리 교회에서 집 한 채 값 (38,500달러)을 미리 내고 자원봉사자 44명을 인솔하여 가서 그곳에서 봉사했다. 천안지역 아산에 82채 사랑의 집짓기에 국내외를 막론한 자원봉사자 5000명을 치료하기 위해 파상풍 예방주사 100명분을 가지고 가서 요긴히 사용하였고, 개업할 때 내가 썼던 이동 심전도기, 초음파, 혈압기, 기타 의료기구 일체를 가지고 가서 사용한 후에 사랑의 집짓기 아산지부에 기탁했다. 5일간 봉사 후에는 지미 카터 부부, 정근모 장로 등과 입주자 전원에게 Key와 성경책 한 권씩 나눠주었다. 또 옛날 밀알친구들과 파주에서 시작하여 대구, 진주, 영산강 유역, 전주, 아산 등 사랑의 집짓기에 사는 주민들을 방문 순회 진료한 후 미국으로 돌아왔다.


한편, 뉴욕에서 개업해서 구입했던 빌딩 두 채를 팔아서 그 돈으로 온전한 십일조로 탄자니아에 10만불짜리 교회를 지었으며, GPS, 이북선교, 고아돕기 등에 30만불 이상을 헌납하였다. 그러면서도 Baltimore 베델장로교회에서 2회에 걸쳐 자원봉사자를 모집하여 춘천과 천안에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보냈다. 사랑의 장기운동도 계속 되어 한국에 신장이식 환자를 보냈으며 치유를 위해 매주 기도모임을 가졌다.


그해 (2001년) 9월 11일 새벽 기도 후 Marriotte Hotel에서 수영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TV 뉴스로 뉴욕 맨하탄의 쌍둥이 빌딩이 쓰러지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게 되었다. 쌍둥이 빌딩은 뉴욕 Wall가에서 유명한 건물이었고, 그 중 한 빌딩의 맨 위층에 'Window of World View'라는 식당이 있었다. 한국에서 오는 많은 손님들을 모시고 가서 저녁식사를 즐겼고, 나에게 미국식 정형외과를 가르쳤던 한두진 선생님을 모시고 간 일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장소였다. 그밖에 친우, 선후배들이 뉴욕에 오면 내가 직접 예약해서 자주 다녔던 식당이었는데 테러로 무너지는 장면을 보게 되어 몹시 안타까웠다.


중보기도로 시작하는 나의 일상


나는 Baltimore Turf Valley Resort Hotel의 수영장에서 2시간씩 걷고 하여 점점 회복되면서 거의 지팡이 신세를 지고 있던 것을 모면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이곳에서 노인들을 위해 의료강의를 여러 번 했다. 한편 둘째 아들이 결혼하고 볼티모어로 이주하여 자녀, 손자, 손녀를 돌보러 이사했다.


지금은 매일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인터넷으로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님의 시편강해를 시청하고, 밀알 중보기도운동을 매일 혼자서 하고 있다.


기도 대상자들은 참 많다. 나의 가족들, 첫째 아들 최광현, 둘째 아들 최성현, 며느리 최지숙, 손자 최지모, 손녀 최은혜, 셋째 아들 최명현 (내년 댈라스에서의 NFL superbowl의 성공적인 진행을 위한 기도), 정신지체 (mental retardation)와 뇌성마비 (cerebral palsy)로 고통받는 외손자들, 처남댁의 유방암 치유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


내 동기생 차철준, 장태환의 손자들의 MR+CP, 췌장낭종을 가지고 있는 동기를 위한 기도, 동문의 식도암 수술 후 쾌유, 조세진 (1971년졸) 동문의 건강, 공대 출신 후배 신장로의 아들 우울증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으며, 베델교회 진용태 담임목사의 기도 제목들, 베델교회 Promise Center 건설을 위한 기도, 한국기독실업 (KCBMC) 회장 김수웅 장로, 강현석 장로들의 기도제목, 조창남 장로 (1960년졸)의 건강회복, 최동수 장로 큰 아들 부부, 할렐루야교회에 부임하실 김승욱 목사, Walter Lee 목사 가족, 존스홉킨스에서 신장이식수술 28례의 성공적인 치료, 김보람 직업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 또, 서울의대 임정기 학장, 서울대병원 정희원 원장을 위한 기도 등 중보기도 대상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그들의 서원 기도를 함으로써 여생을 마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