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이유에서 오끼나와까지 (3) -  조두영
                                       더블린에서                               2004년 11월


(1) 기네스 맥주 향기

  지난 달 중순, 파리 드골비행장 로비에서 더블린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뒤불렁! 뒤로벌렁!”하는 소리가 마이크에서 나왔다. 서울에서 막 도착한 터라 순간적으로 혼동이 일어나면서 나는 혹시 누가 뇌출혈로 나가자빠졌나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넘어진 사람이 없었다. 다시 마이크에서 “뒤블랑! 뒤버릴렁! ”하는 소리가 나왔다. 서울에서 뭐가 뒤집혔나 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몇 초가 지나자 제 정신이 돌아왔다. 아, 더블린(Dublin)을 프랑스어로 ‘뒤블랑’으로 발음하는 것이었지!

  우리 김포공항 국내선 터미널 크기의 더블린 공항청사를 빠져나와 중심가 오코넬(O'Connel)거리 근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무턱대고 찾아 나선 길이라 그날따라 호텔은 몇 군데가 만원이었다. 축구시합이 그날 저녁에 있어 지방에서 젊은 팬들이 대거 몰려들었다는 이야기다. 유럽다운 현상이다. 그날 밤은 호텔근처 술집마다 인파가 몰렸고, 새벽까지 디스코로 온통 동네가 쿵덕쿵 쿵덕쿵 거렸다. 환호성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아일랜드팀이 진 모양이다.

  시차(時差) 때문에 새벽부터 서성거리다 호텔식당이 열리자마자 들어가 풍성한 영국식 아침식사를 기대하고 앉았더니 아일랜드식이라고 나오는 것이 볼품이 없다. 대신 우아하고 오밀조밀하게 꾸민 호텔내부를 구경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밖으로 나왔다. 번화가 중심에 뜻밖에도 Eason이라는 서점이 떡 자리를 잡고 있었다. 들어가니 3층 전부에 꽤 손님이 많고, 맨 위층에는 넓은 대중식당도 있다. 차차 알게 되었지만 이 아일랜드에는 책방이 도시 중심 곳곳에 널려 있었다. 대신 우리가 서울에서 많이 보는 PC방이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아직도 책을 읽고, 컴퓨터는 일반국민에게서 멀리 있었다. 아니다, 실은 두 군데 PC방은 보았다. 그러나 그곳은 모두 중국인이 운영하는 중국유학생 전용의 허름한 곳이었고, 안내문이 전부 한문으로 쓰여 있다. 예컨대 시간당 값이 2 歐元(구원, 유로)이라는 말이 유리창에 붙어있다. 책으로 얻는 지식이 아직은 인터넷 지식보다 더 깊고 넓다는 생각에서 장차 우리 젊은 사람들이 걱정이 되었다.

  더블린 관광객들은 거의 가 다 영국에서 온 듯 하였다. 영국 성공회 쪽인 트리니티(Trinity) 신학대학 구내는 관광객으로 들끓는 데에 비해 아일랜드 카톨릭의 중심인 샌트파트릭(St. Patrick) 대성당에는 구경꾼이 적었다. 아일랜드에서도 경제사회 상류층은 영국계가 많더라는 것이 정말인 듯 하였다. 뉴욕에서는 해마다 파트릭聖人節이 오면 온 만하탄(Manhattan)이 축제일이 되어 그곳 샌트파트릭성당이 있는 5번가를 수만 명 아일랜드 후예들이 밴드와 무용수들을 내세우고 각기 초록색 무늬를 입힌 복장으로 뉴욕市長을 선두로 하여 거리를 누비던 일도 생각이 났다. 뉴욕의 이 성당은 화려하고 장엄하고 부자동네 중심에 있어 관광객과 신자들이 들끓는 곳이다. 오죽해야 영화 ‘代父’에서 이 성당 정문 총격전 장면이 나왔겠는가. 그런데 정작 본고장 더블린의 이 대성당은 화려하지가 않았다. 아니, 차라리 검소하다고 해야 할 지경이었다.

  기네스(Guiness) 맥주공장이 시내 관광코스에 있어 거기도 가 보았다. 스카이라인이 4-5층인데, 이 공장건물은 11층이고 스카이라운지에 전망대와 맥주 주는 곳이 있다. 입장료가 10 유로인지라 맥주 한 조끼만 주니 공짜로고 여길 수가 없다. 흑맥주인데, 맛은 좋았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퍼브(Pub)에 가면 이것만 찾았다. 운 좋게 한국음식점도 찾아내 돌솥비빔밥을 먹었다. 오코너거리 뒷골목 소방서 옆이 시장인데, 거기서 한문간판이 눈에 들어 왔고, 중국음식점 몇 개 옆에 한글로 비빔밥이라 써 있는 찌그러진 간판이 있었던 것이다. 미로 같은 음침한 복도를 따라 가 보니 더블린대학에 유학 온 파리한 조선족 중국인 남학생이 웨이터 노릇을 하고, 그 친척 중년여자가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안타까워 팁을 후하게 주고는 나왔지만 다시 갈 생각이 없었을 정도로 맛도, 분위기도 엉망이었다.


(2) 죽어버린 아일랜드어(愛蘭語)

  해방 전 한국지식인들은 아일랜드를 장차 우리가 따라가야 할 나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1800년 초에 영국에 합병 당했다가 아프리카 보아전쟁과 일차대전에 영국을 따라 많은 젊은이들을 영국군대에 보내 전승에 기여한 나머지 1927년인가에 영국정부에게서 자치정부 수립을 허락받아 독립국가로 된 선례를 따르는 것이 삼일운동 실패 후에 온 일본총독부 문화정책 아래에서 그중 그럴듯한 방안으로 보였던 것이다. 당시 일본은 항공모함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야마도(大和)같은 8만 톤짜리 전함도 쉽게 만들어내는 기술력과 국력을 가지고 있어 한국인들 실력만으로 일본에게서 유혈독립을 꿈꾸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한국출신 대학생들은 대다수가 이런 아일랜드를 미래의 우리처럼 보고자 하였다. 그런 가운데 관심거리의 하나가 아일랜드의 게일語(Gaelic)가 유지되느냐 이었다.

  그래서 나도 이번에 이 고유언어(固有言語)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아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과연 거리 길목마다 달아 놓은 동네 표시판에는 크게 쓴 영어와 그 밑에 좀 작은 알파벳 노랑색 글씨로 아일랜드어가 함께 붙어 있었다. 관공서나 큰 가게 간판도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더블린시민 아무도 자기 나라 말을 쓰지 않고 그저 영어만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책가게에 가도 전부가 영어책이다. 그래도 큰 책방이라면 입구 한구석에 아일랜드어로 된 책이 모여 있는데, 보니 지도와 아일랜드 역사 책 뿐이었다. 모국어는 이미 사어(死語)가 된 것이다.

  나는 온 김에 대서양을 끼고 있는 아일랜드 서쪽 항구도시 갈웨이(Galway)에 갔었다. 작은 마을 열 개 정도의 정거장을 거쳐 3시간 걸린 기차여행이었다.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으며 시내골목과 항구의 갈매기 떼를 구경하다가 목이 말라 기네쓰 맥주를 마시러 퍼브에 들어갔더니 거기에서 처음으로 아일랜드 말을 쓰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옆자리 허름한 신사가 내게 반갑다는 인사를 하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 없어 멍하니 웃기만 했더니 그 역시 싱긋거리며 영어로 “그러면 그렇지, 당신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소이까”라고 해서 그때야 깨달았다. 뒤에 신문에서 보니 내가 갔던 며칠 뒤 주말에 그 근방 어느 섬에 20만 명이 모여 아일랜드 말 축제를 열었다 하였다. 대단한 모임이었다고 아일랜드 신문에서 자화자찬하고 있었다. 그러니 고유언어는 대도시 아닌 일부 농촌에서 가끔씩 쓰이는 말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택시운전수가 그러는데, 아일랜드 인구가 총 4백만으로 더블린 근처에 2백만, 지방에 2백만이라 한다. 한 세대 전, 처음 국영항공사 여승무원을 뽑는 기준 하나가 게일語 구사능력이었는데, 지금은 전 승무원이 영어만 쓴다 하였다. 자기도 이제 옛말을 다 잊어버렸다 한다.

  21세기 말이 되면 영어가 보편어가 되고, 7천만 명 이상이 쓰는 언어라야 지구상에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는 말을 어디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왜 하필 7천만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한국은 남북이 합쳐 7천만이 되니 당분간은 우리 언어가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 안도의 숨을 쉰 적이 있다, 이런 이유에서만으로도 남북이 너무 오래 분단되어 있어서는 곤란하다고 그 저자는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번 北村이 이 게시판에서 “한글은 인터넷에 그중 맞는 글자라 영어 다음으로 살아남아 더 퍼질 언어가 될 수도 있다”라고 한 말이 고무적이기는 하였다.

  한편 학술용 언어에서는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간다. 자국어에 콧대 높은 프랑스에서도 십여 년 전 의학학술지 하나가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바뀌어 간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식민지가 없고 국력이 떨어지다 보니 프랑스어로 논문을 써도 외국인들이 읽을 줄을 몰라 팔리지 않기에 발표자들이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릴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들 프랑스 관계자들은 첫 영어 학술지를 낼 때 서로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한다. 요사이는 독일도 상당수 의학학술지를 영어로 낸다. 한국도 내과 학회지 하나와 전체 의학관련 학술지 하나가 영어로 나오고 있는지 몇 년이 되었다. 한국 정신의학에서도 작년에 처음으로 영어 판 학술지를 내었고, 한국정신분석학회에서는 한 달에 한번 영어만 쓰는 학술모임을 갖는다. 서울대학교병원의 여러 科가 주간(週間)정규세미나 한두 개를 영어로만 하고 있는지도 이미 십 년이 된다. 일본동경대학은 학부강의 절반을 영어로 한다고 한다. 북경 청화대학은 문화혁명의 와중에서도 영어로 공과대학과 의과대학 강의를 하였다고 들었다.


(3) 굿바이, 조이스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연관되어 문학에서 논의되는 작가가 셋이 있다. 그 하나가 DH 로렌스(Laurence)다. 그의 ‘차타레이부인의 사랑’이 나와 성 불구자인 장원주인 남편을 떠나 머슴과 밀애를 즐기다가 드디어 남녀가 도망쳐 나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되면서 인생에서는 性이 가장 중요하다고 20세기 초 지식인 사회가 들끓었다. 그런 말을 한 것이 포로이트 일진대, 로렌스가 이런 정신분석 초창기에 나온 ‘노이로제는 성 욕망을 너무 눌러서 생기는 병이다’라는 설익은 이론을 받아드렸던 것이 이 소설을 낳게 되었다고 세상이 떠들었다. 덕분에 문학계와 인문학계에 정신분석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두 번째는 프랑스작가 마르셀 푸르스트(Marcel Proust)로,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대하소설이다. 유한청년 하나가 오늘에 살면서 잠간씩 옛 기억을 자연스럽게 더듬는 장면이 집요하고 길게 나오면서 소설 내용이 현실과 과거가 서로 겹쳐 이 이야기가 과거인지 현재인지 처음에는 구별이 잘 안된다. 예컨대, 화장실에서 무슨 냄새가 나고, 여기서  불연 듯 어려서 맡던 같은 냄새와 그것에서 어떤 차 향기가 연상이 되고, 그리고 차를 마시던 가족 어른과 거기에 따른 과거인생 에피소드가 쭈르르 따라 나오다가 별안간 현재로 이야기가 돌아오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그래서 ‘의식의 흐름’을 묘사했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정신분석 기법에서 나오는 자유연상(自由聯想)으로, 어느 한 단어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면 무엇이든 다 이야기하게 해서 그 가운데에서 숨은 의미를 찾아낸다는 이 치료기법과도 흡사한 소설방식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 작가가 바로 더블린출신 파리 의과대학 중퇴자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다. 그가 모국어 아닌 영어로 쓴 ‘율리시스’라는 장편소설인데, 어느 더블린 거주 우체국 직원인 청년 하나가 하루 동안 머리에 떠올리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는 어느 하나의 이야기가 아닌 잡다한 이 생각, 저 생각이 겹쳐 떠오른 장면이 계속되기에 평론가들은 “인간의 속마음이 돌아가는 모습, 즉 인간의 의식차원 사고(思考)가 일어나고 진전되어가는 생생한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이 역시 정신분석장면과 흡사하다.

  서울을 떠나기 며칠 전 金承業동문이 나보고 “야, 부럽다. 내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일본책으로 읽은 것이 고등학교시절인데, 한번 꼭 가고 싶은 곳을 네가 먼저 가누나. 그 ‘더블리너’와 ‘젊은 예술가의 초상’말이야.”라고 하였다.   承業이 보다 늦었지만 나도 의예과시절 같은 책을 읽기는 읽었다. 그런데 읽었다는 기억만 있지 거기서 감명을 받았거나 기억하는 대목은 하나도 없었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60년대 말 뉴욕시절 한 권 사서 좀 읽다가 재미가 없어 팽개쳐 두고 있었는데, 몇 해 지나니 영국에서인가 영화로 만들어 상영해 이거 웬 떡이냐고 달려갔던 적이 있다. 역시 재미가 없었다. 주인공 블름(Bloom)이라는 젊은 녀석이 더블린 시내 여기 저기 높은 건물 돌층대에 앉아 무엇인가를 중얼대거나 멍하니 음울한 회색빛 시내를 내려다보던 장면과 웬 젊은 여자와 싱거운 대화를 나누는 장면밖에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을 읽고 가지 않아 더욱 그랬다. 스토리도 이렇다 할 것이 없어 보다가 중간에 나왔던 적이 있었다. 아니니 다를까, 그 영화는 관객이 없어 일찍 막이 내리고, 그 뒤에 언론에서도 언급되는 일이 없다. 그 뒤로 나는 영문학자를 빼고 ‘율리시스’를 읽었다는 사람을 보면 존경이 간다.

  내 과거에 아무리 ‘율리시스’를 집어던졌었다 해도 더블린에 가면 그래도 조이스가 풍겼던 분위기를 맡아 인생에 대한 그 어떤 심오한 깨달음이라도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한구석에 있기는 있었다. 그런데 막상 더블린에 오니 피곤하고 따분하기만 하였다. 어떻게 된 셈인지 ‘내 이 初老의 나이에 조이스가 7,80년 전 내 나이 半밖에 안되었던 시절에 썼던 것에 큰 의미를 붙이다니! 에이, 내가 한심한 놈이지!’이라는 생각이 점 점 들어왔다. 더블린 시내에서 조이스의 자취를 찾아보기가 싫었다. 단장을 집고 삐딱하게 서 있는 실물대 조이스의 동상이 호텔 바로 옆 네거리에 서 있었지만 차일피일 시간을 끌다가 결국 떠나는 날 아침에야 마음속에서 타협을 보아 잠간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관광지도를 꺼내놓고 보니 조이스의 생가는 내 호텔에서 멀지가 않았다. 오코넬거리가 시작하는 네거리에서 두 어 블록 뒤 언덕비탈에 있는 그의 집은 조이스연구소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4층 집이었다. 부유한 동네다.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열지도 않았다. 문 앞에 서서 찬찬히 집 아래 위를 훑어보고, 다음에는 언덕 길 위아래를 한바퀴 빙 돌고 내려왔다. 그리고 “그래, 이만하면 되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나는 속에서 지난 수십 년간 얽매어 오던 족쇄에서 풀려나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조이스 집 골목 모퉁이를 빠져나오면서 나는 조용히 “굿바이, 조이스!”를 중얼거렸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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