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西洋연안 유럽 漫遊記 (其一) :


                                                        (1) 리스본을 향하여


  내 初老開業 자체는 그런대로 괜찮으나, 한편으로는 체력이 딸리고 뒷배 봐주는 종합병원 같은 거대조직이 없어 불안하기도 하다. 그래서 긴장을 풀 겸 가끔 해외여행이라도 해야 견뎌나갈 수가 있다. 나는 지난 달 하순, 그래서 불쑥 폴트갈 리스본(Lisbon)으로 떠났다.

  왜 리스본인가?

  영화 ‘카사블랑카(Casablanca)' 때문이다. 대학시절에 본 이 영화는 그 후 대여섯 번 보고 또 보았다. 마지막 장면이 함프리 보가드가 구해 준 비행기 표 두 장을 받아 비시정권 치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를 남편과 함께 떠나는 悲戀의 애인 잉그릿드 버그만이 가는 곳이 2차대전 당시의 중립국 폴트갈 수도 리스본이다. “아니야, 아니야, 정말 아니야!”를 외치면서 내가 마치 함프리 보가드가 되어 뒷북을 치고 쫓아가고 싶은 곳이 바로 리스본, 그곳이라고 마음속에 못이 박혔기 때문이다. 독일과 영미측 스파이들이 우글대고, 온갖 범죄와 납치, 살인이 횡횡하는 안개 낀 리스본. 그 리스본을 60년 뒤늦어 찾아간다 해도 그곳 어느 골목에서 챙 넓은 모자를 쓴 멋쟁이 버그만을 볼 수 있게 마법의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서다.

  ‘미션(Mission)'이라는 다른 영화도 나를 포르트갈로 유혹하고 있었다. 1500년대 브라질 오지에 선교를 하면서 신앙심을 스스로 북돋으려 자신을 묶은 십자가와 함께 이과수 폭포 못지않은 거대폭포에 자신을 떠내려 보내는 프란시스코派 폴트갈 修道士의 모습이 감명 깊었고, 그래서 그 나라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나 하는 호기심과 외경심이 생겨났다.

  그곳 노래 '파도(Fado)'도 직접 거기서 듣고도 싶었다. 검정 옷을 입은 뚱뚱한 중년여인이 바닷가에 앉아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아들을 그리며 恨을 달래는 데서 유래했다는 포르트갈 식 판소리에서 여인의 영혼과 그 외침을 듣고 싶었다.
  근래에는 李喜雨동문이 게시판을 통해 그가 자주 찾는 이 나라 남단 아름다운 피서지 알카르베(Alcalve) 해안을 사진과 함께 여러 번 소개해주어 자극을 받아왔던 차였다.

  전날 저녁 늦게까지 일을 정리하고 돌아와 “에라, 모르겠다, 출발이다!”라고 간단히 꾸린 짐을 들고 나오는데, 아니 왜 이리 무거운가. 몇 년 전이라면 한손으로 번쩍 들고 아파트 5층 계단을 내려올 수 있어서 그 힘을 막연하게 믿어왔는데, 오늘은 두 손으로 낑낑대며 내려온다. 낭패로군. 어딘지 불길한 징조다.
  인천공항에서도 출국 전에 예년과 다르게 그중 높은 액수의 여행보험을 든다. 국내 보험회사는 내 나이라면 2~3천만 원짜리 최하액 보험밖에 없다고 하는데, 옆 카운터 신참 외국보험사에는 물경 2억짜리가 있다. 속으로 ‘그래, 이제 죽어 이 액수만 남겨도  마지막 家長 임무를 다 하는 것이지. 어디 죽어볼까?’라는 방정맞은 말을 되내인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스맨의 죽엄’이 지닌 심오한 의미가 이리 쉽게 이해된 적이 예전에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노년여행은 보험회사와 나와의 운명을 건 싸움임이 자명해진다. 나는 “운명이시어, 이번 여행을 잘 한 뒤에 귀로에 순간적으로 죽게 해주소서!”라는데, 보험회사는 내게 “너 이노옴, 너 죽기만 해봐라, 가만두지 않을 터이다!”라 한다.

  비수기인데도 대한항공은 滿席이고, 승객들은 조용히 책을 본다.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진 80년대 후반과 그 후 십여 년이 생각났다. 승객마다 불안해서 서성거리며 맥주, 포도주, 청량음료를 청해 마시고, 승무원 손이 모자라 늦게 차례가 오면 먼저 음식준비실을 찾아가 커튼도 서랍도 불쑥 열고 깡통을 꺼내 마시어 음료수 동을 내놓고 낄낄대니 마침내 女승무원이 겁도 나고 기가 막혀 아예 피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그래서 당시에 외국비행사 승무원들의 기피항로가 서울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자신감 넘치는 젊은 승객들이 점잖게 앉아 책을 읽는 것이었다. 아, 대한민국, 이렇게 변했는가!

  비빔밥 대신 양식을 청해 먹었는데도 그냥 덤으로 얹어 준 고추장 튜브 하나를 슬그머니  내 엉덩이 밑에 숨겨놓는다. ‘아, 이제 비상용품이 확보되었군!’




                                              (2)  리스본의 인상


  나라인구 1천만, 리스본 광역인구 2백만이나 도심인구 1백만인 이곳은 마침 雨期로, 무시 때때 비가 오락가락한다. 가랑비였다가 장대비로 변하기도 하니 사람들은 모자만으로 되지 않아 꼭 우산을 들고 다닌다. 바람은 언제나 西風, 대서양에서 밀려오는 바람이다. 신화 속의 미스트랄(mistral)이 과연 맞는 말이다. 

  舊市街地는 바다를 낀 남쪽 저지대에 큰 광장 두 개를 사이에 두고 북쪽 구릉지대의 新시가지와 마주하고 있었다. 내 숙소는 물론 구시가지 한복판이다. 그곳 문화의 진수를 좀더 알고 싶어서 이다. 신시가지가 상대적으로 윤택하다 했지만 전체적으로 리스본은 서울보다 가난했다. 고치는 건물이나 짓고 있는 건물이 없었다. 물가는 서울의 반 정도로 특히 택시 값이 쌌다. 지하철이나 버스 값도 서울의 반이다. 구시가지 밤거리에는 여자들이 골목어귀에서 지나가는 남자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과일가게에도 서울처럼 윤기를 품은 과일이 없었다. 우리가 먹는 南美産 달짝지근 왕포도도 보기 어려웠다.

  호텔이나 택시 기사 같은 서비스 종사자들도 빠릿빠릿한 경쟁심이 없어 보였다. 잽싸게 굴어보았자 결과가 뻔하다는 것인지, 그들은 느릿느릿 여유를 가지고 처신하면서 무시당해 화를 내는 대신 품위와 체념을 보였다. 구시가의 골목이나 골짜기에는 장난감 같은 옛 나무 電車가 한 대씩 움직이고 있다. 차장이 손수 도르래를 달았다 바꿨다 하고, 갈림목에서는 내려서 쇠 지렛대로 선로를 좌우로 움직여 놓고 되올라 탄다. 해방 전 화신 앞에서 안국동과 중앙청 앞을 거쳐 광화문으로 다니던 꼬마전차를 60년 만에 구경하였다.

  포르트갈은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에서 훨씬 벗어난 변방지대에 있었다. 옛날 아시아의 韓半島 같은 존재, 朝鮮朝 후기의 우리 같은 존재다. 문자 그대로 영화 ‘카사블랑카’가 나오던 그 시절, 그 시대에 머물고 있다 할 수 있지만 건물들이 낡았다. 步道와 광장은 노란 기가 감도는 대리석(limestone)으로 널찍하게 깔렸으니 15세기 신대륙과 인도항로를 발견해서 휘몰아 가지고 왔던 金덩이로 이룩한 富의 자취가 남아있다. 포르트갈, 이 나라는 사라져가고 있는 老兵, 맥아더의 老年期라고나 할까, 아니면 낡았지만 깨끗이 걸레질한 장판지 위에 수십 가지 반찬이 가득한 주안상을 대령하는 老妓 운영의 韓定食 집 분위기라 할까.

  서양이라면 언제나 우리보다 잘 살고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세뇌가 된 우리세대의 머리다. 그래서 우리보다 못 사는 광경을 보면 좀처럼 믿어지지 않을뿐더러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육이오 꿀꿀이죽을 먹고 살던 인연이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한심한 일이지만 우리가 죽기 전에는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 이 포르트갈 경우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다른 데서 서양사람들의 심한 가난을 목격하고 민망했던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은 십여 년 전의 이탈리아 시실리 여행이다.
  마피아의 고장이요, 영화 ‘代父’의 배경인 시실리아를 삼사일 간 찾은 일이 있었다. 반도 남단에서 배를 타고 건너는데, 시실리 쪽 메디나에 이르자 길거리에 까만 머리 사람들이 아글바글 댔다. 무슨 일이라도 났는가 유심히 봐도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그대로 기차를 타고 남단도시 까따니아(Catania)에서 내렸다. 일박 하면서 다음 날에는 영화 ‘시네마 천국’에 나오는 에트나(Etna)火山자락 小邑을 다녀 올 계획이었다. 일찍 해가 져서 저녁을 먹으려 길에 나왔는데, 우람한 옛 석조건물로 꽉 찬 도시였지만 열고 있는 식당이 없었다. 중심가 광장을 끼고 한참을 걷다가 드디어 나타난 식당 하나가 있어 반갑게 들어갔는데, 카프테리아식이다. 사람들이 입구를 중심으로 길가 창문 옆에 한 줄로 나란히 서 있지만 막상 식사손님은 아닌 듯 하였다. 식당 안에서는 모두가 한 접시만을 시켜 나도 그런가 보다 해서 한 접시만을 시켜 환한 창가에 앉아 먹었다. 그런데 식당 밖 구경꾼들이 내 바로 코  앞에서 내 접시를 뚫어져라 하고 내려다보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들은 먹으러 온 사람들이 아니고 버스를 기다리면서 남이 먹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임을 곧 알게 되었다. 참 미안했다. 이탈리아 전후영화 ‘自轉車 도둑’이 생각났고, 안델센 동화 ‘성냥팔이 소녀’가 연상되었다. 배에서 쪼르륵 소리를 내면서 부자 집 아이들이 부모와 맛있게 드는 음식을 창 너머 구경하는 주인공들이었다. 西歐에도 그렇게 가난한 고장이 있었던 것이다.

  포르트갈 사람들은 영어를 거의 공용어처럼 쓰고 있었다. 나폴레옹시대에 영국과 연합을 맺고 프랑스와 싸운 적이 있는 이래 영국과 친밀히 지내 온다 했다. 시내에는 書店이 가끔 눈에 띄었지만 우중충하고, 낡은 책들만 많이 쌓여 있었다. 신간이 별로 없다. 나온 신간들도 포장이 조잡하고 싸구려다. 책 사러 들어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 생각을 해보니 포르트갈語로 찍어 낸 책이 많이 팔릴 수가 없는 것 아닌가. 인구가 단 1천만 명인데다 같은 말을 쓰는 유일한 나라가 인구 1억인 남미 브라질뿐이다. 그러나 브라질도 인구의 반 이상이 무식한 인디오들이라 독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글 읽을 줄 아는 2~3천만을 상대로 새로 책을 만들어 보아야 팔릴 건더기가 없다. 돈 떨어지고 氣 죽고, 이렇게 해서 언어 하나가 죽어가고 있고, 문화 또한 사라져가고 있다. 북유럽 4개국이나 동유럽과 지중해의 여러 잔챙이 나라들, 그리고 아시아의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이 조만간 비슷한 신세로 떨어질 터이다. 그리고 인구 7천만인 한국과 월남도 장차 부닥칠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 Gray Line에서 운영하는 리스본 시내관광버스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반나절짜리 관광이 40유로를 받으니 그런가 보다. 주민들은 나에게 그것 타지 말고 市에서 운영하는 승하차가 자유로운 14유로짜리 지붕이 없는 2층 관광버스를 권한다. 이미 미국버스에 올라 탄 뒤라 할 수 없었는데, 뒤에 보니 그 권고가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관광안내원은 유달리 유명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이름들을 많이 들먹이는 것이 다른 도시에서와 달랐다. 근 천년 간 전쟁을 겪지 않은 도시라 건축물들은 잘 보존되었지만 한편으로 따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전쟁은 파괴 이외에 발전도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3) 무적함대를 그려보며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지개를 핀다. 호텔 창문으로 저기 고색창연한 山城의 벽과 망루가 보인다. 아, 마르세이유, 브에노스아이레스와 더불어 세계3대 美港인 리스본 항구를 보게 되니 과연 감개가 무량하다. 이것으로 초등학교시절의 꿈이 다 이루어진 셈이다. 더구나 이 리스본은 스페인의 세비야(Seville)와 더불어 중남미에서 들어오는 金으로 인해 흥청망청 거렸던 16세기 유럽 최대무역항으로 그중 역사가 있지 않은가.

  주막집으로 붐볐을 舊市街 선창가 골목을 걸어도 보고, 바닷가로 나와 언덕을 비스듬히 올려다보고, 멀리 리스본灣 남북을 가로질러 까마득히 높이 세운 20세기 후반 현수교(懸垂橋)를 버스를 타고 지나면서 아래의 항구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제는 오가는 배들이 거의 없다. 다리가 놓여서 그렇고, 비행기가 무시로 왕래하니 항구의 의미가 바랬다. 灣으로 빠지는 테호江 하구에 큰 화물선 서너 척이 정박하고 있고, 그 사이 사이에 요트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고작이다. 유태인 밀집지역 비좁은 중세건물 골목은 하나 둘 관광객을 맞아 새 단장을 하고 있다. 부두 옆 군사박물관 정문광장에서 가파르게 뻗은 북쪽 언덕을 올려다보니 코 앞에 옛 대서양 항해의 성공을 기원했던 우람한 燈臺聖堂, 또 한 언덕 위의 벼룩시장 장마당, 더 위에 고풍의 어마어마한 聖빈센트 수도원, 그리고 맨 위가 상 죠르게 山城要塞(Castelo de Sao Jorge)가 첩첩히 버티고 있었다.

  聖빈센트 수도원은 아주 큰 9층의 중세 건물이고, 그 옥상은 운동장 크기다. 거기서도 바다를 내려다보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유럽을 주름잡던 옛 모습이 떠올랐다. 에잇, 이왕 올라온 김에 골목버스를 타고 산성요새에 이르렀다. 다른 것을 제치고 대짜고짜  맨 꼭대기 망루에 오른다. 어딘지 낯설지가 않다. 어디서 보았더라? 아하,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성벽과 망루의 붉은 색 도는 돌이 생각난다. 망루의 크기, 모습과 위치가 왜 그리 같은가.

  나는 방방걸음이 되어 이리 쭈루루 저리 쭈루루 설쳐대기 시작한다. 저 아래 江 어구에 수많은 전함들이 도열해 있는 幻影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나는 마치 무적함대 용약출진 전승을 기원하는 옛 스페인 요새사령관이나 된 듯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사방 삥 둘러 늘려있는 포대에게 어서 축포를 쏘라는 듯 손짓이 나가고, 혼자 웅얼거리기도 하는데, 앗차, 따라 오르던 두어 젊은 사람들이 내 꼴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아하, 東洋 치매!”라고 이해하는 눈치다.

  그렇군! 1588년은 사상 최초의 이데올로기 전쟁이 서양에서 벌어진 해였었지! 改新敎와 天主敎가 하나님을 놓고 벌린 건곤일척의 전쟁이 아니었던가. 프랑스에서는 新敎의 앙리 3세와 舊敎의 기즈公이 서로 견제하는 사이에서 스페인 대사 멘도사가 돈과 스파이를 풀어 국내정치를 주무르고 있었고, 북유럽과 독일은 신교로 뭉쳐 영국을 간판스타로 떠받들고 있던 반면 구교의 맹주는 물려받은 왕국이 많은 스페인의 펠리페 2세다. 그는 이탈리아와 남부독일,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스페인을 거느린 외에도 네덜란드와 벨지움에 걸치는 프랑드르에 총독을 두어 강력한 육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1871년의 그리스 근해 레판토海戰은 西進하는 투르크 세력과 기독교가 정식으로 맞부딪친 전투로, 스페인이 앞장 선 신성동맹(바티칸, 베니스, 스페인)함대가 대승함으로써 이제 스페인은 여유를 가지고 유럽 대내문제인 新敎國 손 보는 일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마침 신대륙에서 스페인으로 오는 재물을 대서양에서 가로채는 영국의 드레이크가 약을 올렸고, 한 해 전에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자기 사촌언니인 영국 구교 정신적 대표 메리 스튜어드의 목을 베어 戰雲을 짙게 하였다.

  스페인 왕은 베니스, 나폴리, 제노아, 南프랑스,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대소 군함 130척을 리스본 항구에 집합시켰다. 당시로는 전함 중의 대전함인 갈레온(Galleon)船만 60여 척이었다 한다. 여기에 영국에 상륙할 스페인과 이탈리아 陸戰隊 3만명을 태우고 떠나 먼저 영국해군을 바다로 유인해 쳐부순 다음 프랑드르 주둔 육군 5만명을 수송선에 실어 함께  영국본토에 상륙한다는 계획이었다. 네덜란드 주둔 육군은 장교와 하사관만이 스페인 군인이요, 사병은 독일과 네덜란드, 스위스 용병이었다 하니 이 무적함대 전체가 오늘날로 치면 스페인 휘하 일종의 유엔軍이다. 정식함대명은 ‘세상에서 가장 행운이 따르는 군대’로, 별명이 무적함대였다. 이 대함대가 旗艦 상 마르탱 호의 메디나 시도니아 후작 지휘 하에 장도에 오른 것이 그해 5월 말이다. 그때 이 산성포대 아래 강 하구를 지나는 군함 하나하나에 포대는 무운을 비는 축포를 교환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역사학교수 개럿 매팅리(Garrett Mattingly)가 쓴 1957년 판 [무적함대(the Armada)]에 나오는 이야기다.

  내가 산성포대 망루에서 이리 펄쩍 저리 펄쩍 뛰면서 “쏴라, 兒孩야, 예포를 울려라!”고 혼자 괴상한 몸짓을 하노라니 갑자기 맑던 날이 컴컴해지면서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한심하듯 숙덕숙덕 나를 지켜보던 서양 젊은이들도 비를 피해 요새 속으로 들어가 버리니, 이제 세상을 만난 나는 한동안 망루를 독차지하고 “야호! Kg51 게시판 特使 예 왔노라!”고 괴성도 질렀다. 한국말이니 그자들이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점잖게 놀아야 되는 직업이라 서울에서는 평소 근엄한 표정으로 살며, 술을 마셔도 실수 한번 변변히 못했던 콤플렉스를 이제 멀리 서양에 와서 술 힘 빌리지 않고 맨정신으로 풀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5백 년 전 그날 함대사열로 그곳을 통과하고 얼마 가지 않아 태풍으로 스스로 녹아떨어진 무적함대의 운명을 슬퍼하는 듯한 눈물인지, 장대비는 그치지 않고 오래 내렸다. 우산도 뒤집혀 버려 물에 빠진 생쥐가 된 내가 차츰 정신을 가다듬고 주섬주섬 망루를 내려와 산성 안마당에 들어서니 그제야 비가 멈춘다.

  산성 안마당에는 저 구석에 마굿간이 있고, 그 안에 있던 검정 말들이 으흐흥 나를 향해서 달려온다. 주인이 모는 사하라 사막의 낙타, 그리고 에집트 피라미드 옆 낙타 밖에 타 보지 못한 나는 속으로 기겁을 한다. 아, 왜 동해의 울진에서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주인이 끄는 말도 타 본 적이 있긴 있었지. 자세히 보니 간판이 서 있는데, ‘당나귀 요법(donkey therapy)’이라는 글이 들어왔다. 말(馬)이 아닌 당나귀였다. 서양은 당나귀도 우리나라 말 처럼 크구나. 읽어보니 ‘여기 이 당나귀를 만지고 쓰다듬다 보면 동물과 자연교감이 일어나 장차 사람들과의 관계도 情을 느끼는 정도로 됩니다. 자폐아 치료에 좋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개 눈에는 무엇만 보이듯 오나가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놈의 ‘精神療法’이다. 재수 없게 여기서 까지. ‘동키라! 가만있자...’

  그렇지, '동키호테(Don Quixote)'를 쓴 세르반테스(Cervantes)가 바로 그 무적함대가 출발하기 직전 감옥에 들어갔지 않았던가. 레판토해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영웅이 된 세르반테스가 이 리스본 집합 무적함대서는 전투임무가 아닌 경리조달총책(經理調達總責)을 맡았었다. 그런데 함대출항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지연되는 반면 장병들이 무료해 먹어치우는 음식이 어마어마한데, 엎친데 덥친 격으로 물과 음식이 오염되어 장병들 반이 배탈이 나고 전염병에 걸렸다. 실은 영국 드레이크가 전 해에 스페인 남해안을 기습해 쌓아 둔 전략물자인 건조목재를 불태운 바람에 그것으로 만들려던 함선 일부, 그리고 음식과 물을 저장할 나무통들이 말리지 않은 새 목재로 급히 대체제작되었기에 여기서 썩어들기 시작한 것이 그 이유였다. 뒤에 이런 결과가 밝혀는 졌지만 출항당시에는 독직(瀆職)으로 오해받은 세르반테스가 감옥에 들어갔다. 그런데 경리장부가 하도 엉망이라 모두를 갖다 맞추어 보는 데에 장구한 시일이 걸려 재판이 무려 10년이 걸리게 되었고, 그 바람에 세르반테스는 감옥에서 들어앉아 무료를 달래가며 ‘동키호테’를 완성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라만챠의 도덕군자 동키호테라는 老騎士가 필사적으로 싸우는 적이 알고보니 허망하게도 사람이 아닌 風車라는 것으로, 이 소설은 도덕군자 스페인 왕과 무적함대가 태풍이라는 적수 아닌 바람 風자에 녹아나는 허무함을 상징했다. 그리고 독자들은 잘못 정한 목표에 맞추어 허망하게 살다가 죽는 자기들 같은 보통사람 人生無常을 찾아내어 이 소설을 명작대열에 올렸다.

  나 또한 공연히 비 쫄딱 맞아 웃으운 노털 몰골이 된 채 터덜터덜 산성을 내려오며 “나, 이래 뵈도 당대의 생쥐級 동키호테!”라고 거듭 스스로를 위로했고, 그럴 때마다 거덜이 난 우산을 劍처럼 휘둘렀다.




                                                 (4) 파두(Fado)클럽


  벼르던 파두(Fado)클럽을 찾아가 소원을 풀었다.

  이런 곳은 현지인이나 거주동포의 안내를 받아가야 편한 하고 느긋하겠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나. 영화에 나오는 분위기 있는  나이트클럽에 멋진 보이의 안내를 받으면서 슬그머니 지폐 한 장 후하게 쥐어주면 무대가 잘 보이는 좋은 좌석에 앉게 되는 꿈을 꾸면서, 호텔 프론트에 그런 곳 하나를 천거해달라 하였다. 이름과 주소를 받아들고 택시를 타려는데 현관정문담당 늙은 보이長이 더 좋은 곳이 있다면서 택시기사에게 다른 이름을 대주고 그리로 모시라 하고 택시번호를 적어 가진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조금 가다  택시기사가 "값 싸고 더 복작대는 舊선창 가의 진짜 집으로 가시죠"라며 방향을 꺾는다. 그래, 가자. 이윽고 택시는 어두운 거리를 한참 달리다 으슥한 폐허, 쓰러기가 널린 곪목으로 들어가려 한다.

  "아이구, 여보! 먼저 소개받은 곳으로 갑시다"라고 나는 놀라서 택시기사에게 말하니 의외로 순순히 말을 듣는다. 당하더라도 호텔에서 택시번호를 적어가지고 있는 곳에 가서 당하는 것이 덜 당하리라는 생각에서다. 택시는 다시 반대방향으로 얼마를 가다가 불 꺼진 골목어귀에 선다. 무엇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가만히 보니 골목 차 길 중앙에 긴 쇠못 하나가 불쑥 나와 길을 맊고 있었다. 1~2분 기다리고 있으려니 쇠못이 스르르 땅 밑으로 들어가 길이 열린다. 건물 모두가 불이 꺼져 사람이 사는 것 같지않은 골목을 이리저리 두어 번 커브를 돌아 마침내 불이 켜진 어느 식당 앞에 섰다. 여기란다. 가슴이 약간 뛰며, 나는 20 여년 전 로마 첫방문때가 생각났다.

  그때 나는 로마 시내관광버스에 올랐는데,점심시간에 앞자리 점잖은 중년신사가 지나가는 말로 '나는 남미에서 온 관광객인데, 오늘 저녁 함께 쇼 하는 나이트클럽 구경가지 않겠느냐? 혼자 가기 쑥스러워 그렇다. 재미있는 곳이라더라.'고  제의를 하였다. 그러자 하고 만날 장소를 정하고 헤어졌으나 나는 지쳐 저녁에 나가지 않았다. 다음 날 저녁, 나는  어제 못  본 야경을 보려 관광회사 야간관광에 끼었는데, 아니 거기에 그 남미신사가 타고 있지않은가. 나는 어제 못나가 미안해서 인사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소스라쳐 놀라는 눈치였다. "오늘 밤 들르는 술집에 가면 단체로 주문한 쥬스 한 잔 외에는 절대로 다른 것 마시지 마세요."라고 여러 번  부탁하는 안내인의 말을 들어 나는 歌舞와 美姬가 어울러진 술집에 들어가서도 모범생으로 행동하고 정해진 시간에 버스에 올랐다. 거기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중년 일본인 남자가 한참 뒤 차에 오르더니 "옆자리 남미신사가 자기가 살 터이니 한잔씩 더 하자 해서  샴페인을 했는데, 나올 때 보니 화장실 간다던 남미친구가 사라져버려 멱살을 잡힌 채 꼼짝없이 두 잔 값으로 4백불을 물고 나왔다"고 씩씩거렸다. 물론 범인은 차에 오르지 않았다. 그 남미인으로 가장한 그 친구가 나 보고 놀란 것은 아마 어제 밤에도 그렇게 씨운 어리숙 동양인 남자를 나로 착각해서 였다. 그 로마  술집 골목도 리스본의 이 골목과 흡사하게 온동네가 불 꺼진 상태였었다.

  이 유명하다는 파두클럽 'O Faia'는 저녁 8시가 되어오는데도 우리 내외가 첫손님이다. 여자직원은 없고 검은 정장의 등치 좋은 남자들이 자리로 안내한다. 오금을 사리면서 태연을 가장해 앉아 있노라니 이윽고 젊은이 한 패가 우루루 들어왔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아하, 여기 포르투갈 사람들도 라틴이라 저녁식사를 늦게 하는구나. 손님들이 차고, 좋은 음식, 좋은 와인이 나오고, 노래는 9시 반에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자리가 마루보다 두 단 위에 있어 특석인 셈이다. 아래 자리에는 말쑥한 백인청년과 미인형 인도여자가  첫 데이트인 듯 한동안 어색하게 마주앉아 있다가 두어 번 잔을 마주치더니 와인 힘인지 서로가 음식을 떠 넣어주기 시작한다.

  파두 팀은 3 명으로 구성된다. 검정 옷 입은 여자歌手와 역시 검정 정장을 기타리스트와 비올라 키는 두 명의 남자다. 소리와 리듬은 기타가 주도하고, 비올라는 멜로디만  맞춘다. 무대가 아닌 식당 중앙 기둥 사이에 자리를 잡고, 한 팀이 네 曲 정도를 부른다. 조명도 낮추고 거기만 환하게 한 뒤에 우선 가수가 인사말과 사설을 읊고 마이크 없이 노래를 한다. 흥이 나면 손님들도 따라 부르거나 손벽을 친다. 한  20분 하고, 10 여 분 쉰 뒤에 다른 팀이 나온다. 이제 앞자리 두 청춘은 식탁 위로 손을 마주잡고 있다.

  가사를 모르니 감 잡기가 어렵지만 좌우간 슬프고, 허무하고, 애 태우는 내용인 듯 하다. 와인이 들어가니 차차 기분이 들뜬다. 가수는 恨이라도 품은 듯 얼굴을 하늘로 향해  슬픈 표정으로 노래부른다. 파두 팀은 모두 네 팀으로, 젊은 여가수 두 팀, 늙은 여가수 한 팀, 왕년의 남인수를 닮은 50대 남자가수 한 팀으로 반주자도 각기 다르다. 아마 이 동네 파두클럽을 순회공연하는가 보다. 이제 앞자리 청춘은 까놓고 서로의 손등을 애무하면서 여자의 말이 꼬부라지게 농염이 짙어졌고, 남자의 말씨는 기대에 떨리고 있다. 우리가 먹을 후식을 직접 테이블 앞에 와서 불을 붙쳐가며 만들어 주는 멋진 30대 웨이터, 와인만 쭉쭉 마시는 젊은 두 남자, 어머니 생일을 축하한다는 가족모임, 바가지 안쓰겠다고 얼마냐고 따지면서 먹는 중년의 관광객 과부, 무조건 와글거리기만 하는 저 건너편 젊은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서서히 알딸딸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흥이 난 손님 전체에 따라 박수치는 내 손바닥에는 힘이 붙어 있었다. 역시 파두는 분위기로구나.

  식당을 나서니 식당 웨이터가 나와 문 앞에 대령한 택시에 태워준다. 어두운 골목 길을 빠져나오다가 큰 길 어귀에서 차는 다시 쇠못에 걸려 서 있다 풀려나 나온다. 뒤를 돌아보니 골목은 그때도 불이 꺼진 채로 있다. 오색찬란한 야간조명이 있는 서울 야간업소의 거리와는 정반대였다.

  다음에 파두클럽에 가면 이력이 붙어 처음부터 느긋하게 더 잘 즐길 수 있겠거니, 그리고 아말리아 후드리게스(Amalia Rodrigues) 디스켓을 다시 듣고 찾아와 볼까 하는 생각을 하며 호텔로 돌아온다.



                                                                                   (5) : 리스본을 떠나면서


  국립그림타일박물관에서 포르투갈이 자랑하는 그림타일(azulejos)을 14세기부터 시작해 19세기 것 까지 모은 것을 구경하였다. 무어(Moors)인들에게 배워 포르투갈에서 세계적으로 발전시킨 터라 3층의 옛 수도원과 대성당 건물인 박물관이 그림타일로 꽉 찼다. 유럽이 중세 암흑시대에 있던 때 이베리아 반도로 진출해 5백년을 지배했던 이슬람이 수학, 건축, 요업, 의학, 과학을 유럽대륙으로 전파시켰고, 그중 이 그림을 입힌 도자기 타일을 유독 정성스럽게 발전시킨 것이 포르투갈사람들이다. 알람브라 궁전의 그 아름다운 모자익(mosaic) 타일이 생각났다. 비교하라고 옛 터키, 페르시아, 네덜란드, 스페인의 그림타일들도 진열해 놓았다. 몇 년 전 터키의 그림 타일의 옛 고장 이즈닉(Iznick)을 찾았던 기억이 났다. 그때 택시를 대절해 시골길을 두어 시간 타고 가서 그곳 도자기 박물관을 묻고 물어 골목 속에서 찾아내어 환호성을 지르며 들어갔더니 잔챙이 도자기 몇 접시와 깨진 것 수 십 조각밖에 없어 크게 失望했던 일이 있었다. 정말 좋은 것은 모두 유럽 박물관으로 다 넘어간 것이다.

  허긴 작년 겨울, 이란 이스파한(Isfahan)의 푸른 모스크는 가 보았었다. 백 여 미터 높이의 돔과 벽이 온통 푸른 채색 타일로 덥힌 천 여 년 전 모스크들이 우뚝우뚝 늘어 선 여의도 광장 규모의 廣場은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과연 장관이었다. 그런 페르시아였으니 후예인 지금의 이란이 어디 유럽이나 미국에 만만하겠는가. 

  리스본 시내의 칼루스테 굴벤키안(Calouste Gulbenkian) 박물관에도 들렸다. 그런 이름의 미국 석유재벌이 건물과 물건을 통째로 1969년에 기증하였다는 이 박물관은 과연 자랑거리였다. 세계 각지의 진귀한 예술품들이 여러 방에 진열되어 있는 속에 이란 카페트박물관에도 없는 8~9백 년 전의 아름다운 카펫이 여러 장 쭉 늘어서 있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가서 시계 하나 주고 오벨리스크(obelisk)를 받아왔다는 그 비슷한 시계도 여기 걸려 있었다. 앞으로 서울의 리움미술관이 이 박물관처럼 되리라 희망해본다.

  신트라(Sintra)라는 리스본 근교의 옛 왕 여름궁전과 별장지대, 그리고 대서양의 파도도 관광버스로 가 보았다. 小王國이었던 지라 규모도, 건축도 대단하지 않았다. 성채가 있는 조그마한 항구에 새로 지은 도박장도 있었으나 손님이 많은 것 같지 않다.

  택시를 하루 대절해 안내도 받을 겸 편도 3백 km의 여정에 올랐다. 청년 운전기사는 공손하고 말이 적었다. 서울에서 原州 거리쯤을 고속도로로 달려 오비도스(Obidos)라는 城마을에 도착하였다. 이 오비도스城이 포르투갈에 중세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남아있는 단 두 개 古城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한참 때는 리스본에 가까운 관계로 이곳이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는데, 지금은 비수기라 북적대지 않았다. 성벽 아래에 바다와 옛 항구 터가 있어 여름에는 대단하리라 상상이 갔다. 성내 마을 건물과 골목도 중세 그대로의 겉모양을 지니고 있다 했다. 그중 높은 성 마루의 삼층 城 본채가 말끔히 호텔로 단장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古城내부를 호텔로 전환한 것을 푸사다(Pousada)라 하는데, 1960년대부터 스페인과 함께 조금씩 시작하여 지금은 정부 관광부서에서 20 여 곳을 직접 관리한다. 

  택시는 다시 달려 어촌마을 나자레(Nazare)에 닿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 나자레 마을과 푸르른 대서양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마루턱, 증명사진 찍기에 제일 편한 곳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웠던 것이다. 나자레 마을은 옛날부터 사진으로 많이 보아 왔던 곳이다. 어선들이 묶여있는 바닷가, 검정 옷을 입은 아낙네가 바다를 바라보고 남편이 탄 고깃배를 기다리는 석양의 해변, 낡은 선창가의 술집과 밥집, 그리고 파두(Fado) 이야기가 나오는 나자레 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뀌어 옛 마을 건물은 하나도 없고 현대식 비치와 반듯하게 늘어선 새 고급아파트 거리만이 길게 눈에 들어왔다. 여름 한철이면 대단하다고 했고, 아파트 빌리기가 하늘에서 별 따기라고 했다. 한숨이 나오려 한다. 아이고, 너무 늦게 왔구나. 하지만 부산 송도 해수욕장도 우리  중학생이었던 부산피난시절과 엄청나게 변했는데, 내가 공연히 여기서 왜 짜증부리지?

  쾅, 증명사진 한 장 박고 5분 만에 떠난다.(끝)






말세이유에서 오끼나와까지 (3) -  조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