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이유에서 오끼나와까지 (2) -  조두영
롬바르디 평원에서                                             2004년 11월      

                                                           (1) 말세이유에서 지중해 알프스를 넘어                    

  말세이유에서 배를 타고 콜시카(Corsica)섬으로 가려고 짐을 싸고 나와 구항(舊港) 근처 여행안내소에 여객선 시간을 물었더니 불친절하기가 짝이 없었다. 젊은 남자가 답은 않고 무조건 “저기 저 여행사로 가보시죠”라고 해서 갔더니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초등학교시절, 콜시카 독립운동을 하는 와중에서 정부군에게 동전 한 잎에 회유되어 혁명군이 숨은 장소를 알려 준 외동아들을 혁명동조자인 그 아버지가 머뭇거리지도 않고 장총으로 단발에 처형하는 이야기를 읽고서 기분이 어정쩡하기도 하고 세상과 어른들이 무섭다고 느꼈던 장소가 이 섬이다. 그런가 하면 부산피난시절에 본 ‘콜시카의 형제라는 영화제목이 생각나기고 하는 곳이고, 나폴레옹의 고향인데다 호젓하고 경치가 좋다는 곳이기도 하여서였다. 이런 곳은 평생에 한번 큰마음 먹고 가지 않으면 못가는 곳이어서 꿈 한번 꾸어 본 것인데. 그러나 어쩌랴. 에이, 다른 데나 가야지!

  지도를 놓고 보니 말세이유에서 같은 프랑스의 그레노블(Grenoble)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파리에서 말세이유로 올 때는 TGV를 타고 와서 기차여행 재미를 그리 보지 못하였다. 너무 빨리 달려서 연도의 경치가 쓱~쓱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려 오히려 머리가 아팠다. 늙으니 빠른 영상변화를 대뇌와 시각이 따라 잡을 수 없어서가 아닐까도 생각하였다. 프랑스를 다녀 온 불문학자 상당수가 그 곳에서 공부하였다며 자랑을 하길래 언젠가는 나도 가 보려 작정하였던 곳이 바로 그레노블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초고속열차를 피해서 급행이나 지선(支線)완행을 타기로 하였다. 더구나 말세이유에서 그레노블 가는 지선은 산길도 더러 달린다고 지도에 나와 있어 안성마침이었다. 내 호가 왜 겸산(兼山)이 아닌가. 바다만이 아니라 산도 겸한다는 의미라서 말세이유 바다 구경은 이제 할 만큼 했으니 山을 보아야지.

  그런데 산골 기차여행이라면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십여 년 전 남미(南美) 아르헨틴 국제학회에 가서 만난 한국식당 주인이 하는 말이 “여기서는 기차타고 온 종일 가도 山 하나 보이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재미 하나 없어요. 한국은 작은 산이지만 요렇게 조렇게 올망졸망 골짜기들이 좀 잘 나와요? 가려운 데 긁어주듯이 말에요.”이었다. 그는 씩 웃더니 “크고 밋밋한 서양사람 몸보다 작지만 아기자기한 우리나라 사람 몸이 왜 더 좋지 않아요?”라는 쓸데없는 말까지 덧 부쳤다. 나 역시 그날은 그런 여행을 기대하고 기차역에 나가 지선 시간표를 알아보는데, 철도역원마다 나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이었다. 말세이유를 오전에 출발해도 두 번을 갈아탄 뒤 종착역에 도착하는 것은 밤 10시라 했다. 지도로 본다면야 서너 시간 남직 걸릴 거리인데, 지선은 우리나라 道 같은 구역을 넘으면 기차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를 오래 전에 듣기는 했어도 설마 그럴까 했는데, 사실이었다. 프랑스는 파리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철도가 뻗어 동서쪽 인근도시를 가려면 멀리 파리를 거쳐 가듯이 여기서는 대도시 리용까지 한참 되올라가 거기서 東南향 지선을 타고 거꾸로 내려오라는 것이다.
  말도 되지않는 소리였다. "그래, 할 수 없지, 알프스 넘어 이탈리아로 해서 삥 돌아 가보자!"

  이탈리아 쪽 해변국경도시에서 지중해 알프스(Mediterranean Alps)를  넘어 가는 완행열차는 한동안 프랑스 땅으로 다시 들어와 경치 좋은 심심산골 알프스를 향해 제법 빨리 올라간다. 산길이라 역 하나 거리가 보통 정거장 서너 개는 족히 되었다. 근 2천 메타 높이까지 올라가는 길이다. 언제부터인가 구름이 아래로 어른거린다. 승객이 열 명도 되지 않는 일등칸이라 네 명 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앉아 나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이럴 때는 얼큰해야 되는데..!”라고 몇 번이나 속으로 말한다. 때마침 들어있는 단풍도 아름다웠다. 그런데 색이 우리나라처럼 처절하게 붉은 색이 아니고 부드러운 연분홍색이다. 설악산 단풍보다 낫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으나 거기는 걸어 오르내려야 해서 숨이 턱턱 막히느라 제 정신으로 구경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산맥 정상에 있는 기차역은 그림 같았다. 배낭족 대여섯이 반대방향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어깨 너머로 깎아지른 절벽 위 중세마을이 보였고, 역 바로 옆에는 별 둘짜리 2층 여관이 ‘식사되고 빈 방 있다’는 네온사인을 껌뻑이고 있다. 에이, 그냥 내려 ! 그러나 기차는 출발한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다음 정거장 마을인 땅데(Tende)라는 곳인데, 역 앞 깊은 계곡을 건너 마주보이는 산 언덕에 중세에 만들었을 어마어마한  예수石像이 두 팔을 쫙 벌리고 서 있고 그 발 한참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혹 다시 거기에 간다면 묵고 싶은 마을이다. “야 !”하고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르고 벌떡 일어나 좌우 유리창을 두리번거리는 이 뚱뚱한 동양노인을 뒷좌석 노트북을 두드리던 젊은 세일스맨이 못마땅한 듯이, 아니면 한심한 듯이 노려보다가 눈을 돌린다.

  이 지중해에 바짝 붙은 알프스 통로가 옛날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원정 때 넘던 그 길이 아닌가도 싶었다. 물론 이 철도길 자체는 아닐 터이지만 이 근처 자동차길 어딘가가 그럴 것이다. 산을 넘어 올 턱이 없다고 안심하던 이탈리아군의 허를 찔러 대포와 수레를 메고 끌고 알프스를 넘어가 적을 뒤에서 포위해 승리를 거둔 길 근처라는 생각에 나는 더 흥분이 된다. 세상 모든 전쟁이 다 그랬다시피 이 전쟁에서도 나폴레옹군 대열후미에는 하사관 아내, 술집 여자, 창녀를 잔뜩 태운 수 백 대의 마차행렬이 희희낙락하며 따라갔다는 일화가 있다.

  날이 저물었기에 나는 중간 소도시 아무데서 그냥 내렸다. 밤에는 경치가 보이지 않으니 일찍 자두는 것이 오히려 좋다. 쿠네오(Cuneo)라 했다. 알프스 너머 첫 소도시다. 호텔 바닥은 대리석이라 냉기가 감돈다. 그래도 아침식사는 기막히게 색채조화를 이룬 식당에서 마음껏 먹고, 진한 커피도 큰 잔으로 두 잔을 마신다. 이런 가정식 호텔식당에는 투숙객이 직접 요리해 먹을 수 있게 기본주방기구를 갖춰 놓는다. 이탈리아 시골남자들은 소수이지만 집을 나서서도 직접 두 손으로 계란도 부쳐 먹는다. 나는 이런 아저씨들이 쏘세지도 이것저것 골라 썰면서 ‘오, 쏠레미오!’를 낮은 소리로 부르는 것도 보았고, 그런 시설이 없으면 투덜대는 것도 두 어 번 보았다. 그러나 이 날 아침은 넥타이부대가 전부라서 그런 쇼를 볼 수 없다. 숙박비에서 내게 다소 바가지를 씌운 주인노파가 찔끔거려서인지, 아니면 내게서 왕년의 ‘구반포 쟝가방’ 풍모가 보여서인지 디바(diva) 같은 자세로 다가와 아랫배를 살짝 앞으로 내밀면서 악수를 청한다. 궁한 김에 내 손이 나도 모르게 턱 나간다.

  이 쿠네오란 도시의 중심가로 나가 본다. 큰 광장을 동서남북으로 시청, 소방서, 호텔, 고급상점들이 나란히 둘러싸고 있고, 보도는 회랑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 회랑 천정 십 여 메타마다 광목 큰 천이 걸려있는데, 거기에는 그 고장 사람들 사진 하나씩이 간단한 소개말에 곁들여져 있었다. 자세히 읽으니 ‘아무개의 별세 60주기를 맞아 다시 한번 추도하노라’는 제목 아래에 지금부터 60년 전에 죽은 주인공 남녀의 사회적 업적이 검은 인쇄체 글자로 찍혀 있었다. 이 고장 맥주공장 주인이던 사람, 이 고장에서 처음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던 사람, 나치에 저항운동을 하다가 감옥에서 죽은 사람, 고아원 보모를 평생 했다는 여자, 평범하였지만 자녀들에게는 소중한 어머니였다는 여자, 중학교 교장선생님, 공산당 데모 선두였다는 사람 등등 모두가 그럴 듯한 이유를 들어 “아들이나 손자가 되는 내가 이렇게 추모하니 여러 분은 알아 달라!”는 식이었다. 뒤에 호텔에 돌아와 물어보니 그것은 일주일 거는 데에 돈을 얼마 내야 한다면서 그 돈이 모이면 거금이 되니 市도 좋고 가족도 좋아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아직 부고만 신문에 크게 내는 풍조가 있지만 앞으로는 그런 광고기사를 내면 신문사 벌이가 될 터였다. 아이디아 아닌가 !



                                                                (2) 포프라나무 숲길을 보며
 
  이탈리아로 가면 웬일인지 마음이 편해진다. 다른 사람들도 더러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의사인 내게는 하나 더 이유가 있다. 다른 직종 사람보다 이탈리아 말에 더 친근감을 느끼는데, 의예과 시절에 라틴어를 배워서 그런 것 같다. 우리 15회 모두가 그럴 것이다. 의대 본과에 올라가면 해부학을 배워야 하는데, 지금은 영어를 사용하지만 당시는 학술용어가 무조건 라틴어여서 미리 준비를 시켜서다. 문리대 언어학과 강사인 동숭동 신학대학 金신부에게서 한 학기를 배웠다. 지금도 기억나는 가장 긴 해부학 학술용어가 귀 근처 어느 뼈 속에 있는 구멍 이름인데, 읊어 본다면 ‘Apertula interna canaliculi nervi petrosi superficialis minoris'다. 뼈 하나를 학교에서 빌려 와 이불 속에 누워 무조건 외어야만 했다. 구두시험도 보았는데, 이때는 교수 앞에 나가 뼈 한 쪽을 건너 받아서 이를 가지고 이런 저런 이름설명을 라틴어로 해야 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외어야 머리에 더 잘 들어오기에, 그렇게 외우느라 이탈리아 발음이 의대생에게는 입에 발렸었다. 해부학 시험문제도 백지 넉 장을 나누어 준 다음 '해골(skull)에 관해 쓰시오!’라는 식이다. 그러면 우리는 달달 외운 것을 드립다 백지 앞장과 뒷장에 써 내려갔다. 50분에 다 써야 되는데, 어떤 친구는 종이 한 장을 더 타서 쓰기까지도 하였다. 이러니 이탈리아 말 단어도 눈에 익다.

  여담이지만 그때 시험감독 해부학 조교로 있다가 후에 지방의대 학장으로 간 梁某선배를 만난 우리 동기 ㄴ구 하나가 “학생 백 여 명이 쓴 답안지가 무려 근 천 장이 될 터인데, 그 많은 것을 일주 이내에 어떻게 채점하시고 교무과에 성적을 제출하셨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답 왈 “이놈아, 그걸 왜 물어! 사실은 선풍기를 틀어 놓고 모든 시험지를 바람에 날려 그중 멀리 간 놈 시험지부터 A를 주고, 다음 거리마다 B와 C로 했다, 왜? 이제 와서 덤빌래!”였다고 전해 들었다. 기가 막혔다 한다.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지만 좌우간 자세히 다 읽고서 나온 점수는 아니었을 것이다. 무즙파동 같은 것은 우리로서는 꿈도 못 꾸었을 낭만시대였다. 내 답안지는 대충대충 글씨를 덜 써서 가벼웠기에 멀리 날아가 그 과목만은 한번만 빼놓고 A를 맞은 주제라서 나는 침묵을 지켰었다.

  그래서 내게는 이탈리아 말 발음도 쉽다. 기계적으로 그냥 스르르 나온다. 영어 잘 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발음이 어렵다. 키오스크에서 물건을 살 때도 내 앞자리 미국인은 얼굴이 뻘겋게 망신을 당해도 나는 주인에게서 빙긋 웃는 대우를 받는다. 단어도 의학용어를 기억하니 관광할 때 요긴하게 써 먹는다. “무엇을 주세요”라는 의미의 “미 다이 ...”를 처음에 갖다 부치고, 물 한 병 살 때는 “미 다이 uno boutica aqua”하면 된다. 맥주는 ‘biera’, 백포도주는 ‘vino blanca’라고 응용한다. 한번은  로마근처 티볼리 분수궁전에 가서 출입구를 알려고 “우 에 apertula(孔)?”라고 했더니 수문장 안색이 갑자기 경외와 존경으로 변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아마 프랑스 말과 자기네 고전어를 섞어 쓰는 동양인을 처음 만나서였을 것이었다. 같은 의사라도 요즈음의 후배의사들은 학생시절 얍삽하게 영어로 쉽게만 배워 선배보다 무식하다.

  아믈 아믈 저 멀리 알프스산맥을 바라다보며 북 이탈리아 대평원을 급행열차 일등칸에 앉아 가로지르는 운치는 제법 그럴 듯 하다. 유럽 다른 고장과는 달리 여기서는 밭이 기차 길에 바짝 붙어 있어서 풀 냄새, 흙냄새, 감자 냄새, 양파 냄새, 토마토 냄새가 시원한 냉방을 뚫고 차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우리나라 철도연변 같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흙 보다 여기 흙이 좀 더 푹석하고 거무스름해서 비옥하게 보인다. 우리 땅이 척박하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광경이다. 그리고 밭과 밭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이 평원 곳곳의 시냇가 둔덕에는 키 큰 포프라 나무들이 줄 맞추어 시원하게 서 있다. 한여름에는 더욱 그렇다. 대지가 온통 초록색이다. 시내에서는 고기 잡는 아이들이 서넛 씩 짝지어 보이고, 이따금 스쳐가는 반대방향 긴 열차 냉방장치 없는 이등칸에는 더워서 웃통을 벗어젖힌 젊은 남자들이 통로에 나와 열어놓은 위 창문 모서리에 두 손을 얹고 바람을 맞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 저 포프라 나무를 우리가 70년대에 긴급수입하여 서울 한강변 아파트단지 가상자리에 쭉 심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이탈리아 포프라는 쑥쑥 자라 경치에도 한몫을 하고, 방음에도 한몫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탈리아 좋은 나라, 나무도 좋은 나무, 미쏘니 옷과 구치 백도 좋은 나라!

  밀라노(Milano)를 향해 기차는 마음 놓고 막 달린다. 날씨도 알프스를 못 넘는 구름에 가려 우중충하다. 스쳐가는 반대방향 열차에는 내다보는 젊은이들이 없다. 어느 틈에 흙냄새가 스며들어 내 코를 흐믓하게 만들었고, 연변 둔덕의 뿌여스름 안개 낀 포프라 숲도 눈에 들어왔다. 가을이라 잎이 많이 떨어졌다. 슬그머니 젊어서 본 안개 낀 포프라 숲이 나오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 이번에는 내려서 그 포프라 숲을 걸어보리라고 작정한다. 그렇구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감독의 영화 ‘혁명前夜(Before the Revolution)'이었지!

  영화는 밀라노 근처 농촌마을이 무대였다. 장원(莊園)을 중심으로 소작농과 머슴들이 나오고, 일차대전 발발 초기 어느 한 가정에서 젊은 농군 하나가 징집을 당해 장원 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같은 마을 다른 젊은이들과 어울려 안개 낀 포프라 숲 속 오솔길을 괭이를 들고 줄 지어 면사무소로 가는 장면이 첫대목에 나온다. 다음 대목은 다시 한 세대가 흘러 이번에는 첫 주인공의 아들이 이차대전 무쏘리니 군대에 징집을 받아 낡은 장총을 멘 다른 청년들과 면사무소로 가기 위해 똑같은 새벽 안개 자욱한 포프라 길로 걸어들어 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대목은 다시 칠팔 년이 흐른 이차대전 후 이번에는 장성한 그 집 큰 아들이 말리는 농장주 아들 말을 듣지 않고 마을 농가 친구들과 공산당 무력혁명운동에 자원하여 대도시 밀라노에 가려고 어느 날 새벽에 안개 짙은 그 포프라 숲길로 떠나는 것을 부엌 구석에서 소년인 작은 아들이 웅크리고 앉아 말없이 지켜본다. 삼대가 시간 간격을 두고 집안에서 사라지는 이야기다. 인상적인 것은 이들 출전용사 3대(代) 집단들인데, 떠나가는 포프라 숲 안개 길에서는 모두가 말을 잃고 기 꺾인 사람 모양 고개를 축 늘어트리고 걷는 모습들이었다.

  이는 베르톨루치의 자서전적(自敍傳的) 영화다. 빠르마(Parma) 인근 대장원주(大莊園主)를 할아버지로, 빠르마 신문에서 영화평을 쓰는 시인(詩人)인 아버지를 둔 베르톨루치는 여유와 가난을 다 보면서 갈등 속에서 컸을 것이 짐작된다. 대저택인 자기 집만 빼고 사방이 모두 좌익인 흙냄새 진동하는 농촌마을에서, 친구들 모두가 좌익 부모 밑에 있는 분위기에서 그는 컸다 한다. 그 영화를 보며 나는 내 중학 2학년 시절인 9.28 수복 전야가 연상되었다. 그날 저녁, 내가 살던 동네인 창덕궁과 비원(秘苑) 돌담을 끼고, 쌀 자루와 참나무 막대 끝을 뾰죽하게 처서 만든 창(槍), 아니면 총검을 낀 따꿍총(소련제 하시바銃)을 멘 사람이 더러 끼어 있는 창백한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천천히 그리고 말없이 북악산 쪽으로 걸어 올라가던 모습이었다. 유엔군의 포위망을 피해 북으로 후퇴하는 서울시내 공산당 젊은이들이었다. 그 어둑어둑해지는 무렵, 나는 골목 어귀에 쪼그리고 앉아 그 날도 역시 한 끼만 먹어 허기 진 눈으로 그들이 유령처럼 지나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었다.

  롬바르디 평원의 포프라 나무와 숲은 내게는 그런 기억들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였다. 꼭 한번 그 숲 냄새를 맡아 보자, 그리고 내 나이 보다 약간 아래인 베르토루치를 향해 마음 속에서라도 한번 “부엥 쥬르노!"라고 인사말을 걸어보자고 나는 기차 안에서 다짐을 하였다.       

  기차가 속도를 줄이는 것을 보니 밀라노가 가까운가 보다. 배가 고파지는 것이 무언가를 나는 기대하는 것 같았다. 역(驛) 도시락이 생각이 난 것이다. 기차가 좀 오래 서 있다 떠나는 밀라노 중앙역 비나리오(프래트홈)에는 “점심이요, 점심이요!”를 연발하는 장사들이 왔다 갔다 했다. 15불을 내면 서울 백화점 종이가방 같은 큰 봉지 하나를 건네주는데, 그 안에는 작은 비닐 병에 든 물, 삶은 닭 반 마리, 긴 빵을 반으로 쪼갠 것 하나, 살라미 넉 조각, 양상추 서너 잎, 버터와 소금 후추 봉지, 정확히 두 잔이 꽉 차게 나오는 종이팩 포도주, 입가심하라는 치즈 두 조각, 엄지 손가락만한 케익 한 덩이, 옆자리 이성(異性)을 위한 보양보음용(補陽補陰用) 쵸코렛 한 알갱이, 그리고 빨대 하나, 물 따로 술 따로 하라는 컵 두 개가 널찍한 티슈 한 뭉텅이에 싸여 있었다. 왕년의 새마을호 대전역(大田驛) 우동은 허겁지겁 국물 반을 쏟고 흘리며 먹은 뒤에도 콧구멍 속에 튀어 든 고축가루 때문에 곧장 코를 풀어야 했으나 여기서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느긋이 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사정이 변해 있었다. 우리나라 변한 생각은 못하고 남의 나라는 그대로 있으려니 하는 착각이 문제였다. 역 구내는 고급화되어 도시락 장사는 없고, 고급 샌드위치를 파는 우아한 간이매점이 쭉 서 있는 것이 아닌가.



                                                         (3) 베르톨루치 감독을 생각하며

  밀라노에서 곧바로 支線완행열차로 갈아타고 흙을 찾아 그 근처 아무 小邑이나 차편이 되는대로 떠났다. 바로 발치까지 밭이 와 있다. 온 평원이 초록색 작물로 덮여 있다. 포프라도 아직 잎이 덜 떨어져 그것도 초록색이다. 롬바르디아 지방의 건물 나무덧창들이 왜 초록색으로 통일되어 있는지를 알만 했다. 나는 다시 베르톨루치(Bertolucci) 감독이 만든 영화들을 회상한다. ‘혁명전야’는 그가 20대에 만든 것이라 어릴 쩍 친구들이 사는 마을의 청년들이 좌익운동에 나서는 모습을  초등학교 초년생으로 지켜 볼 때를 회상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베르톨루치의 그 뒤 영화로 내가 본 것은 ‘체제순응자(The Conformist)'(1971)였다. 그가 30대 초에 만든 것인데, 제목이 말해주다시피 과격혁명분자가 아니라 대세를 따라 안주하는 청년을 그린 것이다. 무쏘리니 치하의 어느 부유한 親파시스트 가정의 아들이 주인공으로 나와 갈등에 찬 생활을 하지만 그렇다고 고급사교계나 상류계급 처녀를 멀리 하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한 인생이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영화의 거의 모든 야외배경이 온통 초록색 나무와 풀로 뒤덮인 것이 이채로웠다. 이탈리아의 여름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영화였다. 내 눈에는 그가 바로 영화 주인공 같았다.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3)는 참 말이 많았다. 지금도 말이 많다. 늙은 히피인 말론 브란도가 낮 모르는 영계히피 여자와 호텔도 아니고 집안도 아닌 텅 빈 어느 석조건물 맨바닥에서 원초적인 형태의 性을 나누는 모습에 나는 처음 구역질이 나는 듯 했다. 나라고 유별난 도덕군자는 아닌데 그럴 지경이니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한 5~6년 전부터 일반영화에 가볍게 性器 노출이 시작되었고, 포르노 분야에서는 구강성교 장면이 많이 나오는 ‘Deep Throat’라는 영화가 화제작으로 부각되었다시피 바야흐로 성개방시대가 도래하고 있기는 해도 베르톨루치의 이 ‘~탱고’는 너무 하였다. 유럽에서만 상영되고, 미국 일본 한국에서는 상영허락이 나지를 않았었다. 그래서 내가 본 것은 한참 후 미국에서였는데, 역시 관중이 적었다.
  이 영화를 만든 지 한 십여 년이 지나 베르톨루치는 영화잡지와의 한 인터뷰에서 “그 영화 만들 임시에 나는 낯 선 여자와 신나게 성교를 하는 환상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었다오. 지금도 내가 왜 그랬던지 모르오”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이어서 그는 그 영화 개봉이후 친하던 말론 브란도가 자기를 피해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것, 자기는 배우에게서 그 혼을 빼어내 만천하에 보이고 싶다는 것, 배우는 촬영시작 때는 단순히 대본 속 인물역할만 하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하지만 이내 자기 자신을 그 속에 들어내고 만다는 것, 사진 속에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하는 작업은 배우가 얼굴 뒤에 숨긴 참모습을 끌어내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베르톨루치는 그러기에 자기는 유명배우를 쓴다는 것이다. 요컨대 말론 브란도가 한방 되게 먹은 것이 이 영화다.

  베르톨루치가 자기를 잘 나타낸 영화는 내가 보건대 ‘달(月, La Luna)’(1979)다. 여기서는 내가 아직도 들어가 보지 못한 밀라노의 라 스칼라座 내부가 나오며, 로마 고대 공중목욕탕 옆의 야외음악당이 나오는 가하면 대조적으로 롬바르디 평원 시골과 흙이 나온다. 여자 주인공은 세계를 주름잡는 미국출신 오페라 가수요, 그녀와 거의 별거생활에 들어가는 주인공 남자의 늙은 어머니는 황토색 피부를 가진 롬바르디 평원 흙 속에 사는 왕년에 한몫 하던 여자인데, ‘제3의 사나이’로 유명해진 늙은 알리다 바리(Alida Bari)가 이 어머니로 나온다. 이 영화의 주제는 근친상간이다. 오페라 여가수는 떠난 남편 대신 데리고 사는 초등학생 아들을 유혹한다. 아들에게 멋진 양복 정장을 입히고 자기도 요염한 복장을 한 이 30대의 어머니가 친히 차린 저녁식사 테이블에서 촛불까지 켜 놓고 아들을 어른취급하면서 하나하나 가르치면서 유혹하는 장면에 온 세상 난다 긴다 하는 관객들이 떨었다. 그 남편도  시골집으로 어머니를 찾아가는데, 이 어머니 역시 외동자식인 이 아들에게 배반당한 상처가 아직 덜 아물어 얼굴표정이 착잡하기 그지없다. 함께 있자고 하지도 못하고, 네 여편네에게 즉각 돌아가라고도 못하는 어머니의 갈등에 찬 얼굴이 보름달에 비치는 모습이 처절하다.
  두 여자 가운데 하나는 젊어 아들을 현재 열심히 유혹하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유혹당해 고분고분하던 아들에게 이미 한번 배반당한 늙은 여자다. 제목의 ‘달’은 여성 상징이요, 제 정신이 아니라는(lunatic) 뜻이다. 자기 어머니 아니고는 그 누구의 말도, 아내의 말도 이탈리아 남자들은 듣는 법이 없다는 농담이 그대로 이 영화에서 나온다고 보겠지만, 이 어디 이탈리아 사람들 만에 국한된 것이랴 ! 아들 놓기 힘든 심정이 어디 그 나라 여자만이겠는가. 이 영화가 나올 당시가 구미에서 어린이 성폭행이 사회적 이쓔가 되어 있었다. 베르톨루치의 어머니는 원래 아일랜드 사람인데, 그 자신도 어머니에 대한 집착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하였다.

  베르톨루치가 나이 50에 만든 영화는 ‘Sheltering Sky’(1990)다. Shelter란 영어로 쉼터나 보호소, 피난처가 되겠는데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할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되었지만 당시도 제목 번역이 어려워서 인지, 겉멋이었는지 영문 그대로 놓아두고 있었다. 미국 30대 괴짜 부부가 이차대전 후 직장을 다 내던지고 아프리카 튜니시아로 사막과 사막문화를 찾아 장기체류하려고 와서 겪는 인생담이다. 부부는 사막 근처 불모지 한 복판 언덕 위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절대고독을 맞보며 전율한다. 남자는 귀환도중 유목민 천막촌에 잠입해 밤새 농도 짙은 性을 경험하다가 후에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는다. 충격을 받은 아내는 사막으로 혼자 뛰어 나가고, 지쳐 혼절한 그녀는 隊商들에게 발견되어 실려 사막 속 베드윈族 부락으로 간다. 그 곳에서 그녀는 대상 우두머리 집의 창고에 갇혀 수 주일을 지내면서 매일 두 눈만 빼고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찾아오는 우두머리를 맞는다. 이들은 대화가 통할 리 없고 단지 묶인 채 당하는 강간 비슷하게 일이 벌어지지만 여자는 그때마다 절정에서 절정을 거듭 누린다. 그리고 여자는 풀어주는 날 그대로 탈주해 원래 묵던 호텔로 돌아오지만 정신이 반 나간 상태에 있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는 상당수 유한계급 중년여성들의 환상 중의 하나인 강간환상이, 그것도 남자 중 가장 세다는 아랍 남자에게 유감없이 당해보는 소망이 이 영화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베르톨루치는 참 짓꿎다. 그가 ‘~탱고’를 찍었을 무렵에 있던 ‘낯 선 어떤 여자와 섹스를 싫건 해보고 싶다는 강박에 시달렸다’고 한 그의 말이 다시 생각나는 영화다. 이 ‘~sky’에서는 여자가 주인공이 되어 죽도록 싫건 섹스를 해보는 것으로, 먼저 번 환상과는 반대로 여기서는 얼굴 모를 남자가 나타나지만 실은 둘 다 같은 무의식의 발로라고 나는 본다. 동문들은 이제 이 얼굴 없는 여자가 감독 일생에서 누구를 지칭하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베르톨루치는 오랜 기간 정신분석을 받았다 한다. 그래서 인지 그의 영화는 대개가 애매하게 끝이 나 뒷맛이 무겁고, 심리적 관점에서 우리 무의식을 건드려 관객들 애간장을 뒤집는다. 한마디로 이야기 해 나오는 주인공이 우리 속 무의식 일부임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그의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든 다른 영화 ‘마지막 황제’는 잘  만들기는 했으나 심리적 의의는 별로다. 

  이렇게 속에서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와 심리세계를 정리하고 있는 사이에 기차 창 밖 저 지평선에 뾰죽한 막대기 하나가 나오다가 점점 켜져 갔고, 높아져 갔다. 드디어 그것이 성당의 높은 탑 모습으로 나왔고, 점차 그 밑 주위에 하나의 둥그런 마을이 펼쳐지고 있음이 눈에 잡혔다. 이 광활한 평원 한복판에 들어선 농촌지대 小邑인 종착역 크레모나(Cremona)가 조금씩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히야, 별 데를 다 와 보네 !



                                                      (4) 먼저 간 고교시절 옛 벗을 그리며

  장년(壯年)의 역원(驛員)들이 서성대는 크레모나驛 프랫트홈을 빠져나오는데, 그중 한 역원이 피던 담배를 그대로 철로에 집어던진다. 이번 유럽에 와서는 처음 보는 광경이라 이런 배짱있는 자는 어떻게 생겼노 해서 슬쩍 쳐다보니 아니, 이건 원 말세르노 마스트로야니(Marcerno Mastroiani)가 아닌가! 깜짝 놀라 다시 보니 그 배우보다는 좀 후주레하긴 해도  비슷한 얼굴이었다. 아, 이탈리아 남자들이 미남인 것을 내가 잠간 잊었었구나. 밀라노 스칼라座 인근의 말 탄 교통경찰들은 하나같이 씨저(Caesar)를 닮은 얼굴이라 그 주위에는 넋을 잃고 쳐다보는 동양여성들이 차에 치어도 좋다는 식으로 몰려 있고, 저만치에는 체면 때문에 차마 노골적이지 못하지만 미국 아줌마들이 꾸물대며 시선을 그리로 파는 모습을 보아 온 것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오죽해야 미국인 유부녀 캐서린 헵번이 이탈리아 청년과 차마 헤어지지 못하는 영화 ‘로마驛’이 나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담배 버리던 그 용사(勇士) 옆의 다른 역원도 뒤 따라 똑같이 담배를 그리로 버린다. 야, 여기가 바로 사람 사는 데로구나 하는 기쁨이 내 가슴에서 우러나왔다. 아암, 그래야지 ! Italia, sono boni !

  걸음도 가벼워지고 콧노래도 나왔다. 이번에는 저녁 정찬(正餐)을 먹으리라 하고 호텔로비에 물어 시내 최고식당을 찾았다. 이탈리아 음식에만은 내게 자신이 있다. 젊어서 아내에게 기본훈련을 받은 데에다 중년에는 피에몽테 치바쏘(Chivasso)라는 소읍 기차역 앞 가족호텔에서 숙식을 함께 하는 ‘뻰지오네(pensione)’형식으로 여러 날을 묵으며 그곳 철도건설 인부들 합숙하는 밥을 같이 끼어 먹었던 일로 일가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먹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그때 인부들도 저녁식사만은 매일 메뉴가 다른 정찬으로 먹었고, 나는 그래서 음식과 식사법을 배웠다. 이탈리아 와인 고장이 지척인 그곳에서 인부들은 물론 다른 남자손님들도 저녁에는 반주로 꼭 와인 큰 병 하나씩을 마셨다. “루쏘(Russo)? 브랑까(Blanca)?”에 어느 단어 하나만 답하면 하우스 와인(vino casa)이 턱 나왔었다. 이런 내 왕년 실력인지라 크레모나 식당 급사는 관광객 메뉴를 내놓다가 일일이 주문하겠다는 내 말에 시큰둥, 첫 한 두 접시 먹는 것을 보고서는 기연가 미연가, 그리고 좀더 두고 본 뒤 나를 고객으로 인정하였다. 자기네 말 쓰지 않는 동양 늙은이가 혼자 와서 시켜 먹는 것을 처음 보는지 저만치에서 주인 내외 역시 내가 요리를 물리는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조바심치며 자주 지켜보는 눈치다. “무슨 아이스크림 드실래요?”라는 물음에 서슴없이 “마케도니아(Macedonia)!"라고 답하는 순간 나는 완전 통과하였다. 나오는데, 내게만은 두 서넛이 도열하여 공손히 인사를 한다.

  크레모나 교외에도 나가 맨 흙도 밟아보고 만져보고, 밭이랑도 걸어보고, 포프라 오솔길도 걸어 보았다. 근처 작은 농촌마을도 기차타고 가 보았다. 그러나 영화에 나오는 장원 같은 대농장은 철로 연변에 없었다. 아마 보이지 않는 더 깊은 곳에 있으리라. 시내에서는 몇 백 년 묵은 유명한 성당도 들어가 보고, 후문 바로 뒤 돌계단에 숨은 듯이 서 있다가 빈 쇠 접시를 코앞에 갖다대는 노파에게 돈도 주었다. 20층이라는 교회 옆 벽돌 탑은 오를 욕심이 나지 않았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길 가다 보니 ‘바이올린 제작귀재 스트라디바리(Stradivari) 옛 작업장이 바로 이 집 2층 이었다’는 판이 붙은 오막살이 건물도 나왔다. 동네 미용실로 쓰이고 있었다. 아, 번쩍 옛 벗 하나가 떠올랐다. 어쩐지 내 이상하더라니! 밀라노 역에서 두리번거리며 출발기차를 찾고 있을 때 왜 그렇게 크레모나라는 글이 쏙 머리에 들어오던지 나도 이상했었다.  

  스트라디바리 무덤과 동상이 서 있는 광장 나무의자에 앉아 나는 6년 전 저 세상으로 먼저 간 尹充基라는 옛 벗을 생각하였다. 초등학교부터 친구였던 사람이다. 저 세상으로 떠나가기 얼마 전에 充基는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과 똑같은 질의 바이올린을 만든다는 우리 나이의 한국인 명장 악공(名匠樂工)을 만나 보수 없이 그를 키워주는 일에 종사하였었다. 압구정동 골목 속에서 그 고급가게가 문을 열던 날 나와 몇몇이 초대를 받아 갔었다. 나는 다 늦은 나이에서야 그에게서 처음 이 명기(名器)와 이탈리아인 명장 이름을 들었다. 그때 아마 크레모나라는 이름을 들었던 것 같다. 이 한국인 명장도 20년 이상 이탈리아에 살면서 반평생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의 제작비법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나무 종류와 칠에 쓰이는 재료 만드는 법을 알아내었으며, 마침내는 한국에서 똑같은 재료를 얻게 되어 개업을 시작했으며, 이미 이탈리아에는 알려져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말이었다. 그는 고교시절 역사공부를 좋아하였고, 후에 일본에 있으면서는 최서면(崔書勉)선생 연구소가 어려울 때 발 벗고 나서 모금을 했고 자기 회사 돈으로도 도와주어 주일대사관 행사에서는 교민대표로 늘 뽑혀 대사 다음으로 인사말을 하였었다. 거나해지면 그는 서양 오페라 아리아들을 잘 불렀고, 프랑스 낭만파 詩를 원어로 읊었다. 이런 친구요, 이런 크레모나다. 

  벤치에 앉아 나는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고 말했다, “야, 이 친구야, 네 魂이 나를 여기로 불렀구나. 너, 내 머리에 들어와 실컨 봐두어라!”



                                                               (5) 융프라우를 바라보며

  밀라노發 스위스 바젤行 급행열차 후미 일등칸에는 외줄로 나 있는 1인석 줄 꽁무니에 앉은 내가 유일한 승객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기차 뒤 경치도 들어오니 이것이 바로 고급여행이 아니고 무언가. 여행객이 없는 계절, 그리고 잔뜩 흐린 날씨, 주중의 오후이니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철도를 운영하는 유럽이 부러우면서도 예산낭비가 안쓰럽다. 이런 여유가 오히려 지역간의 교통을 편케 해서 전 유럽 통합에 기여를 해오고 있어 정책적으로 모든 국가가 협조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철도 노조가 힘이 세어 그럴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여하튼 이를 뒷받침하려니 유럽기차 값은 만만치가 않다. 역에서 산 와인 작은 병을 따서 조금씩 홀짝거리니 천국이 따로 있나. 백여 년 전 백색인들이 동양에서 따 먹던 열매를 이번에는 동양인인 내가 거꾸로 따 먹는다 생각하니 웃음도 나오고, 두루두루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아쉬웠던 것이 크레모나의 ‘애향부인회(愛鄕婦人會) 저녁 가두행진’을 보지 못하고 떠나온 것이었다. 이탈리아에는 오랜 전통 가운데 하나가 어느 마을이건, 소도시이건 저녁 일몰 직전에 동네 유지의 부인들이 마을광장에 모여서 함께 줄 지어 마을 중요한 곳 몇 곳을 통과해 다시 처음 장소로 돌아오는 행진을 하는 것이다. 선두에는 촌장(村長)이나 시장의 부인들이 선다. 평상복보다 좀 좋은 옷은 입지만 화려한 복장은 아니다. 평소보다 약간 빠른 걸음으로, 그리고 보조를 맞춘 행진이라 구경거리로서 제 격이다. 이 행렬 출발부터 귀환까지의 시간에 역시 동네 남정네들은 마을광장 노천카페에 모여 잡담을 나누면서 행렬구경을 좀 떨어져 한다. 여자끼리의 마을 단결에도 좋고, 남자들도 눈요기가 되어 행동으로 옮기는 마을 불상사가 줄어든다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이 행렬을 피렌체(Firenze)같은 도시에서도 보았다. 모인 20 여 명 일행이 땅딸한 시장 부인을 선두로 걷기 시작하는데, 중년여성이 앞에, 젊은 여성이 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마 나이 자체보다는 남편들의 직책에 따른 순서가 아닐까 했다. 이들은 쉬지 않고 사교적인 이야기인지를 주고받으며 걸었다. 한 가지 失望스러웠던 것이 선두부대 용모가 기대와 달리 평균 이하였다는 점이다. 근대로 오면서 점차 남자가 사회적으로 출세를 하려면 아내 용모가 너무 잘 나서는 곤란하다는 뜻일 것이다. 적들이 많이 생기고, 아내 놓칠까봐 신경을 써서 일 것이다.  

  경치만 보는 것도 민망하다. 나는 속으로 다음 알프스 여행 때는 독일 알프스에 있는 옛 히틀러 별장 자리를 가 보아야겠다고 하면서 더블린에서 산 [히틀러 마지막 여비서 手記(Hitler's Last Secretary : Until the Final Hours)]를 펴 든다. 트라우들 융게(Traudl Junge)라는 여자가 2차대전 발발 직후부터 베를린 총통 벙커에서 히틀러 자살할 때까지 이웃 방에 거처하면서 보좌했던 것을 바탕으로 쓴 자서전 비슷한 手記다. 그녀는 이 수기를 소련군과 미군 수용소에서 풀려 나온 직후인 1947년에 초고를 써 두었다가 2002년에 손질 조금 해서 내었는데, 이것이 다음 해 영어로 번역되었고, 내가 산 것은 다시 한 해 뒤인 2004년도에 보급판으로 나온 것이다. 전쟁사의 백미는 2차대전, 그것도 베를린 함락사라서 나는 여기에 관해 쓴 책을 여러 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소문으로만 들었던 이 수기가 내 손에 들어와 나는 너무 반가웠다. 그래서 기차에서 나는 틈틈이 이 책을 읽었다.
  전에는 굇벨스(Goebels)가 히틀러보다 하루나 몇 시간 먼저 자살했다고들 했는데, 이 여비서 수기에서는 그 반대 순서였다고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다. 바깥세상과 절연된 채 오로지 총통부(總統府) 속에서만 근무하였기에 이 여비서 눈에는 인간으로서의 히틀러 모습이 많이 띠어 그렇게 묘사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수기를 근거로 하여 요사이 유럽에서 문제가 되는 독일영화 ‘몰락(Der Unterlang)’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영화는 베를린 함락을 목전에 둔 히틀러 최후 12일간을 그린 것으로, 주인공이 아주 인간적으로 그려져 있어 다른 나라사람들이 수군대고, 유태인들은 분개한다고 들었다. 금년이 종전(終戰) 60년이 되는지라, 독일국민은 “이만큼 우리를 혼내주었으니 이제는 풀어주어야지 !”라는 심정일 테고, 반대쪽은 “아직 더 좀 !”의 상태인 것이다.

  책 조금, 바깥구경 조금 하는 사이에 기차는 마지오레湖를 지나 두리둥실 브리그谷關(Brigg Pass)을 타고 넘어 벌서 스위스 한복판 고원(高原)지대 쭌(Thun)역에 와서 선다. 동쪽 멀리 석양을 활짝 받은 흰 산 봉오리가 둘이 보인다. 아, 하나 약간 낮은 것이 아이거(Eiger)이고, 높은 것이 융프라우(Jungfrau)이구나 ! 이 기차역 일대는 해가 벌써 떨어졌고, 저쪽도 다른 산들은 그저 꺼멓게만 나오는데, 이 두 봉오리는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봉오리는 날리는 눈으로 둘러싸여 마치 얼굴이 날리는 백발로 뒤덮여 있는 인상이다. 슬그머니 오싹해졌다. 두려워졌다. 마귀할멈 둘의 얼굴이 내 쪽을 향해 그리로 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전에는 이런 으스스한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왜 오늘따라 이럴까. 생각해보니 산을 보는 각도와 방향, 그리고 석양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시각자극을 달리 만들고 있었다. 문득 연상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낳은 명장(名匠) 구로자와 아끼라(黑澤 明)의 ‘꿈(夢)’이라는 옴니버스 스타일 영화의 제3번 이야기였다. 영화는 이 감독의 자서전적 뉴앙스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자타가 평하는 것으로, 이야기 구성은 각기 다르지만 나오는 주인공은 모두 남자다. 처음에는 어린 소년이 나오고, 다음에는 청년이, 다시 중년남자가, 끝에 가서는 노인남자가 나온다. 영화 속 세 번째 이야기는 이러하다.

  외줄 밧줄에 주줄이 허리를 묶여 눈보라가 무섭게 휘날리는 고산영봉(高山靈峰) 줄기를 타는 네 사나이가 있다. 숨이 턱턱 막히고, 한 치 눈앞이 보이지도 않으며, 이들은 한 걸음 가고 쉬고 쉬고를 거듭한다. 뒷사람은 자꾸 쓰려지려 하며, 리더는 간간히 뒤를 돌아보고  “힘내라, 조금 가면 우리가 쳐 놓은 천막 캠프가 있다 !”고 외친다. 그래도 대원은 하나 하나 눈 속에 쓰러지고, 리더는 이들에게 “자지 말라, 자면 죽는다 !”고 흔들어 깨운다. 그러다가 마침내 리더도 폭삭 넘어져 잠에 빠지고 만다. 눈은 그 위에 계속 싸인다. 얼마나 지났을까, 리더가 눈을 떠보니 누군가의 손길이 자기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올려다보니 흰 옷 입고 산발을 한 여자 하나가 자기를 깨우고 있었다. 여자는 한편 악마와 같은 자기 눈초리를 애써 가리면서 그에게 저리, 저 하늘로 같이 날아가자고 손짓을 한다. 그가 가만히 있으니 집요하게 여자는 어서 가자는 독촉의 손짓을 하고, 어린 아이 얼르듯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놀란 리더는 싫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러니 이제는 여자가 화를 내면서 그의 어깨를 들어 올린다. 그는 강하게 손을 들어 여자의 팔을 막는다. 승강이는 계속되고, 마침내 그가 화를 내며 손으로 여자의 얼굴을 확 밀어내자 여자가 휙 하늘로 날아가면서 눈바람으로 변한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 리더가 눈보라가 잠든 고지를 훑어보니 바로 코앞에 베이스캠프가 있었다. 그는 기운이 나서 대원들을 흔들어 깨우며, 여기서 이야기는 끝난다. 동사(凍死)나 추락사를 면하는 등산가 이야기이며, 여성과 모성(母性)을 사신(死神)과 결부시켜 보는 이야기다.

  구로자와 감독은 어머니를 싫어했다는 느낌이다. 이 ‘꿈’ 영화의 제1번 이야기도 대여섯 살 난 사내아이가 어머니에게 공연한 책을 잡혀 벌로 혼자 깊은 산골에 들어갔다가 여우 결혼식 행렬을 숨어보게 된 이야기다. 제2번 이야기에서도 칠 팔 세 먹은 소년 하나가 어머니와 큰 누나들에게 무시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감독 자신이 어려서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을 알겠다. 구로자와는 동경에서 태어난 사무라이 계급 후예로, 그를 출세시킨 것은 사무라이 영화(時代劇)였다. 내 머리를 흔든 것은 구로자와가 이 영화 스토리를 혹시라도 지금 내가 보는 이 융프라우 정경에서 힌트를 받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그 역시 운이 좋았던 사람이다. 아, 나보다 이삼십 년 앞서 구로자와가 이 계절, 이 시각에 이 자리에 있었구나 !

  정신분석에서는 어린 아이가 어머니를 어떻게 보느냐에 문제를 놓고 두 가지 큰 줄기가 있다. 그 하나가 프로이트(Freud)의 견해인데, 그는 어머니가 언제나 어린이에게는 사랑을 주는 여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프로이트 자신은 자기 아버지를 어려서 우습게 여겼고, 어머니에게는 평생 효자였다. 그래서 그에게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이 나오기가 쉬웠다. 이런 것을 우리는 정통학파(orthodox school) 견해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프로이트보다 한 세대 뒤에 나온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의 견해인데, 여기서는 아이가 간난이 시절에 자기 어머니를 보는 눈은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덩치가 엄청나게 큰 괴물이 자기에게 다가와서 자기 몸과 마음을 완전지배하는 것으로 어머니를 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 클라인은 이혼녀로, 3남매의 어머니였다. 그녀의 이런 견해를 우리는 클라인학파(Kleinian school) 이론이라 부른다. 이 이론을 응용한 것이 요즈음 나오는 ‘에어리언 1, 2, 3’ 같은 공상과학영화다. 거기서는 우주괴물이 어머니 상징으로 나오거나, 인간인 어머니가 우주괴물과 몸을 섞어 다시 괴물을 낳는 비극을 저지르는 것으로 나온다. 즉 어머니가 무섭고 괴이한 존재로 나오는 것이다.

  구로자와의 이 영화 토막을 보면 클라인학파의 주장을 많이 생각나게 한다.



                                                                         (6) 호수(湖水)여 !

  베른(Bern)을 떠나 제네바(Geneva)를 거쳐 프랑스 그레노블(Grenoble)로 향하는 열차다. 프랑스로 넘어와 기차가 좀 달리는가 했는데 서쪽으로 꽤 큰 湖水 하나가 나왔다. 길게, 아주 길게 나왔다. 폭은 기리에 비한다면 그리 넓지가 않다. 알프스 중턱이다. 그런데 어딘지 낯익은 호수다. 어디서 보았더라? 데자 뷔(Deja vu) 현상인가? 이것 봐라, 이거 혹시 프랑스영화 ‘무도회(舞蹈會)의 수첩(Un carnet de bal)'에서 나오던 그 호수 아니야?

  ‘무도회의 수첩’, 우리세대에게는 참으로 잊지 못할 영화다. 원래는 1937년, 프랑스 명장(名匠) 쥴리엥 뒤비비에(Julien Duvivier)가 만들어 당시 온 세계를 열광 속에 누빈 영회인데, 우리나라는 내 의예과 2학년인 1956년 초가을에 불이무역(不二貿易)이 일본에서 필름을 들여온 것이다. 비도 약간 내리는 낡은 필름으로, 덜 지워진 일본어 자막이 흐리게 얹혀 보이는 영화였지만 장안의 젊은이들을 매료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당시의 최일류 단성사(團成社)에서 보았다.

  자, 기억을 더듬자.
  이야기는 크리스틴(Christine)이라는 방년 17세 소녀가 숙녀로서 사교계에 데뷔하는 화려한 무도회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거기서 여덟 명 젊은 청년과 번갈아 춤을 추면서 다시 만나자는 열렬한 요청을 받는다. 감격에 겨운 그녀는 이들 젊은이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 놓는다. 그녀는 그러나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청년을 골라 열애 끝에 결혼하고, 20년을 살다가 과부가 된다. 우울과 허망 속에 있던 어느 날, 그녀는 서랍 어느 구석에서 옛날 수첩을 발견하고 명단에 실린 이름들을 지금은 어떻게 사나, 아직도 총각인가 아니면 홀아비인가 하는 호기심이 생겨 하나 하나 방문해보기로 한다. 그녀는 여러 도시, 여러 지방에 흩어져 사는 이들을 하나씩 수소문해서 찾아간다,
  어떤 자는 냉정한 중견 민대머리 은행원이 되어 있고, 어떤 자는 배불뚝이 식료품 소매상이었고, 또 다른 자는 싱글벙글거리는 이발사로 떠벌리고 있었다. 이 이발사 배역이 아마 페르낭델(Fernandel)이라는 당시의 희극 명배우였다. 공처가(恐妻家) 전당포주인으로 낙착한 인생도 있었다.

  또 다른 어느 하나는 시인(詩人)이라면서 만날 장소를 어둑해질 무렵의 도시 중앙공원 무슨 나무 밑으로 정해 준다. 그리로 나간 그녀는 시인을 만나지만 곧바로 형사들이 닥쳐 시인을 체포하는데, 자세히 보니 형사 왕초가 바로 그녀 수첩에 올라 이번 남자 다음에 만나려던 자가 아닌가. 그 도시 악명 높은 강도의 왕초가 바로 시인이었고, 형사들은 오래동안 이 도둑을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가 마침내 은신처를 나와 눈에 잘 띄는 공원으로 용감하게 걸어 나온 그를 미행해 잡게 된 것이다. 크리스틴과 형사는 이렇게 만난 것에 서로 놀란다. 그러나 도둑은 태연하다. “자네, 오래만이네, 내 이왕이면 자네 손에 잡히고 싶었다네. 그래서 자네가 나올 줄 알고 내 여기로 나왔다네. 나 또한 크리스틴을 이렇게 만나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네. 내 자작시(自作詩) 한 首만 읊게 해주게. 그리고 잡아가게나.”라는 것이 도둑이 형사에게 크리스틴 앞에서 하는 말이었다.
  이 도둑 역을 당시 최고성격배우 루이 쥬베(Louis Jouvet)가 맡았는데, 이 시 낭송 장면이 영화의 백미였다. 그가 읊는 詩는 역시 당대의 시인인 작크 쁘레벨(Jacques Prevert)이 이 영화를 위해 특별히 지은 것이다. 지금은 다 잊었지만 ‘... 공원에 두 남자가 있었네, 하나는 어쩌구 저쩌구, 또 하나는 ...’하는 시인데, 그 영화를 보던 시절 나는 이 프랑스 시를 외워서 술자리에서 슬 슬 잘 읊었었다. 이렇게 영화와 인연을 맺은 시인 작크 쁘레벨은 그 뒤 아주 씨나리오 작가로 나서서 좋은 각본 몇 개를 썼다.

  다시 영화 ‘무도회의 수첩’ 이야기로 돌아가자. 만나고 나서는 하나씩 남자 이름을 지우는 여주인공 수첩에는 이제 한 남자만이 남았다. 사실 이 남자야말로 그녀가 남편 못지않게 첫 무도회가 끝나고 놓치기가 아쉬웠던 사람이었다. 그 남자는 시골 어느 큰 호수 건너 오지마을에 살고 있다. 호수를 모터보트로 “통 통 통...” 건널 때 키를 잡은 배 주인은 그 남자가 혼자 사는 고성(古城) 주인이라 해서 그녀의 호기심은 더해 갔다. 그러나 마을에 도착해보니 그날이 바로 그 남자의 장례식 날이었다. 호수에 손을 담그며 돌아오는 보트 속에서 크리스틴은 무엇인가 인생무상(人生無常)을 깨닫는 듯 하다. “통 통 통...” 소리가 호수 가득히 번지며 영화는 끝난다.
  이러니 젊은이들이 미치지 않을손가. 그해 그 늦가을, 단성사 일대 종삼(鍾三) 피막골 도라므통 막걸리집들은 초저녁부터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술 취해 아우성치며 도라므통을 뒤집어엎는 청년들로 주인들 비명이 잦았다. 그리고 청년들은 자기를 버리고 선배의 품에 안긴 동년배 여자친구가 20년 세월이 흐르면 과부가 되어 자기를 찾아오려니 하는 환상 속에서 실연의 아픔을 잊으려 몸부림 쳤다.

  이 호수를 보니 고3시절 늦가을 몇몇 악동들과 어울려 명륜동 입구 술집 ‘일취옥(一醉屋)’ 이층 다다미방에서 가끔 한판을 벌리던 일이 생각나고, 그때 거나해서 읇조렸던 프랑스 낭만파시인 알퐁스 라마르틴느(Alphonse Lamartine)의 ‘호수(Le Lac)'라는 시 구절이 머리에 떠올랐다.

     ‘오오, 湖水여 ! 세월은 한 해 조차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녀가 다시 보아야만 할 정다운 이 물가에,
     보라, 그녀가 전에 앉아있던 이 돌 위에
     나 홀로 앉아 있노라 !
         .  .  .  .  .  .  .  .
      오, 時間이여, 너 운행을 멈추거라,
      너 행복한 시절이여, 흐름을 멈추거라 !
      그리하여 우리네 일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로
      덧없는 기쁨이나마 맛보게 하라.
         .  .  .  .  .  .  .  .
      (어쩌구 저쩌구 ... )
  
  돌아와 지도를 보니 이 호수는 부르젤(Bourgel)湖였다.

   2005년 1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