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끼나와(沖繩) 방문기

1) 오끼나와 근해(沖繩 近海)를 내려다보며

  지난 新正 휴일을 이용해 오끼나와 3박4일 단체여행에 끼어 다녀왔다. 보통은 2박3일이라던데, 어딘지 좀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하루 더 긴 것을 택하였다. 초로기가 되니 사람들마다 “이제 몇 년 가지 않아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웬만하면 지금 가보고 싶은 데를 다녀와야지...”라고들 해서 은근히 부담을 느낀다. ‘그렇지, 이것이 오끼나와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터이니!’라는 마음으로 떠났다. 인천공항에서 2시간 반이 걸린다 했다. 제주도를 지나 한참을 가다 창 너머 아래를 내려다본다. 대략 일본 규슈 남단과 오끼나와 중간쯤인 것 같은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아아, 저기 저 멀리 동북쪽 바다에서 그때 일본전함 야마도(大和)가 침몰했구나!”라는 생각이 무심코 들면서 일본패망을 눈앞에 둔 1945년 당시의 전황에 관해 읽었던 것이 머리를 스쳐 갔다.

  巨艦巨砲주의에서 나온 7만3천 톤짜리 史上 최대의 戰艦 야마도는 착공 7년만에 준공되었는데, 바로 일본이 진주만 공격한 지 일주일 후가 된다. 자매함 무사시(武藏)가 레이테 해전에서 미 함재기의 벌떼같은 공격으로 가라앉고 나서 야마도는 본토 모항에서 나오지 않다가 마지막 전쟁터요 무덤이 될 오끼나와를 향해 왕복이 아닌 편도만의 기름을 넣고 구레(吳) 군항을 떠난 것은 그해 4월 6일이다. 당시로서는 최대 사정거리를 가진 46인치 함포 9문을 단 야마도의 속력 또한 27놋트 이었다. 내가 60년대 초반 해군시절 탄 1천5백 톤급 62함 속력이 15놋트 이었고, 제대할 무렵 도입한 호위구축함이 21놋트 이었다. 처음 이 호위구축함을 탔던 군의관 선배가 “야, 달리니 어찔어찔해서 혼났네!”라던 말이 기억난다. 비교가 된다는 말이다. 지금 와서는 ‘꼭 그렇게 야마도를 알면서 희생시켜야만 했던가?’라는 의문이 있다지만 당시 일본해군으로서는 연합함대가 거의 괴멸된 마당에 우두머리 군함에 해당하는 야마도가 싸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오히려 수치였다 한다.

  오끼나와로 출격하는 일본해군은 연합함대 제2함대 사령장관 이또 세이이찌(伊藤整一)중장 지휘 하에 야마도를 위시한 순양함 1척과 구축함 8척 이었고, 이들을 오끼나와 근해에서 기다리고 있는 미 해군은 항공모함 20척, 함재기 4백 여 대, 전함 5척, 순양함 15척과 구축함 수십 척 이었다. 말하자면 야마도는 반자이(萬歲) 자살공격을 하려는 판이었다. 일본측은 항공모함이 다 가라앉아 함재기도 없고, 육상기도 없고, 가미가제 특공기마저 다 날려 보내고 난 뒤라 항공엄호가 전무하였다. 출격 날은 본토 연해라 겨우 버티겠지만 다음 날 낮의 미 함재기 집단폭격, 그리고 야간의 미 잠수함대 어뢰공격을 견뎌내야만 그 다음다음 날 오끼나와 근처의 미 함대와 한판 붙는다는 전투시간표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야마도는 다음 날 오전 동중국해(東中國海)로 나오자마자 해전은 해보지도 못하고 미군 함재기 2백 여 대의 공격으로 오후에 구축함 6척과 함께 침몰하고 말았다. 해군장병 3천 여 명도 함께 水葬되었다. 60년 전 4월 7일이다. 

  생존자는 2백 여 명이라 하는데, 이들이 돌아와 기록한 手記도 많다. 그중 하나가 副함장 구마무라(熊村)대좌의 [통곡의 바다]라는 수기다. 침몰 5분 전 왼쪽 30도로 기울고 있는 야마도 갑판 위로 미군기의 기총소사가 난무하는데, 그 마당에 병사들이 오히려 기지개를 펴며 이제 인생에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갑판 여기저기에서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서 있다가 자기를 보면 동작을 멈추고 태연히 거수경례를 부치더라는 것이 여기에 나온다. 미국인 대중 전쟁사가(戰爭史家) 존 톨랜드(John Toland)의 [旭日, The Rising Sun]에 보면 바다에 뛰어든 병사들은 모여들어 원형을 이루고, 서로 격려하며 군가를 합창하면서 구조를 기다렸다. 달려드는 상어들이 자기보다 큰 동물은 일단 처음부터 잡아먹지 않는다 하여 바다 속 병사들은 모두가 긴 훈도시를 비상용으로 차고 있다가 길게 늘어트렸다. 여기 저기 바다에서 일본해군가가 계속 울려 퍼졌다. 기력이 부친 병사들이 “어느 부서 아무개 먼저 갑니다”라고 말하면서 옆 사람 손을 놓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기가 차츰 생겨 처음 떠있던 수가 몇분의 일로 줄었다는 구절도 있다. 미군이 일본군 생존자를 위해 일본 구축함 두 척은 상처만 입히고 침몰시키지 않았다 하며, 이 두 척이 어둑해져서 침몰해역으로 돌아와 생존자를 구출했다.

  요즈음 일본서는 이 전함 大和 이야기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는 기사가 오늘 중앙일보에 나와 있다. 어제 저녁에는 케이블 TV 'Discovery' 채널에서 한 시간 이 야마도 이야기를 방영하였다. 거기에 보니 미군 함재기들이 일부러 야마도의 왼쪽 옆구리만을 집요하게 어뢰공격해 마침내 12번째 어뢰에 함이 왼쪽 한쪽으로 기울어 침몰했고, 갑판 위 巨砲의 무게로 인해 뒤집히는 와중에 먼저 포대가 떨어져 나왔고, 뒤이어 군함 자체 내 화약고에서 일대폭발이 일어나 군함이 앞뒤 둘로 쪼개져 바닥에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일본측도 이는 미리 비상시 자폭하도록 해놓았을 것으로 추측만 하지 증거가 없어 확언은 못하고 있다. 수심이 오직 4백 메터 정도이니 인간이 만든 제일 큰 전함이라는 뜻에서 언젠가는 새 기술을 써서 건져내어 전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2) 首里 옛 수비사령부 언덕에서

  오끼나와 나하(那覇)국제공항은 바다 가에 있으며, 단층짜리 공항 빌딩은 우리나라 중도시 고속터미날 크기에다 장식 또한 그러했다. 직원들 모습을 보니 일본 본토사람과 달라 좀 뚱뚱하고, 크고, 털이 많고, 거므스름 하였다. 얼굴도 더 크고, 특히 코가 크고, 코망울이 크게 퍼져 벌룽벌룽하였다. 여유를 부리며 슬슬 일을 하는 것이 본토에서 긴장해서 능률적으로 일하는 공항직원들과는 달랐다. 용모는 태평양군도 사람과 일본사람의 중간에 있고, 작업태도는 미국사람과 일본사람 중간에 있는 듯 하였다.
 
  오끼나와 첫 방문지가 현도(縣都) 나하市 북부 언덕에 있는 슈리성(首里城)이다. 위치로 보아 비행장에서 찾아가는 길은 마치 서울로 치면 마포나루 비행장에서 종로와 화동 언덕을 거쳐 북악산(北岳山) 산등성이로 가는 것 같았다. 산마루가 首里로, 여기는 오끼나와의 옛 수도 격이다. 산마루 뒤로 멀찍이 높은 산이 마치 서울 북한산(北漢山)인 양 솟아 수리성을 엄호하는 지형이다. 14세기 말에 왕국이 되고 여기 수리에 城을 쌓았고, 일본에게 합병 당해 일개 현(縣)으로 된 것이 1874년이다. 소규모 옛 궁궐 건물이 태평양전쟁 때에 없어졌다가 그 후에 재건한 것을 구경하는 것이 첫 순서인 것이다. 뒤에 알았는데, 비행장에서 슈리까지는 근래에 깐 모노레일이 있었지만 단체관광이니 버스를 타고 갔다. 가는 길에 안내자가 말하는데, 오끼나와의 모든 건물은 시멘트건물이라면서 태풍이 하도 자져서 목조건물은 견디기 어렵다 하였다. 건물에 간판도 잘 걸지 않는 것도 바람에 날려 사람이 다치기 쉬어서라 했다. 나는 속으로 그 이유 말고도 전쟁 때 목조건물이 쉽게 불에 타 혼이 나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首里城 관광에 관심이 가 있었지만 나는 제사보다 제사 밥에 더 관심이 많은 경우처럼 태평양전쟁 전흔(戰痕)을 찾는 데에 몰두하고 있었다. 오끼나와 전투시에 이 곳 슈리성 지하에 일본 육군 우시지마 미쓰루(牛島滿)중장 휘하의 제32군 사령부가 있었던 것이다. ‘아마노이와또(天岩戶) 전투사령부’란 간판을 부친 동굴요새였다. ‘하늘바위 집’이라는 글자가 재미있다. 관광버스를 내린 지하주차장이 크고 견고했기에 나는 혹시 여기가 옛 지하요새 입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대하던 본토 지원이 끊긴 일본 수비대는 미군 상륙 이전 일주일에 걸친 함포사격으로  모두 녹초가 되었는데, 이는 함포사격이 그냥 포격이나 폭격과는 달리 지축을 울릴 정도로 엄청나서 지하에 숨어있는 사람들로서는 꼭 지진 같은 진동을 받아 얼이 빠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 사령관은 맞대응에서 지구방어전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어차피 지게 되어 있으니 얼마나 오래 섬을 뺏기지 않으면서 얼마나 많이 상륙군에게 피해를 주느냐에 주력하였다. 그래서 4월 1일의 미군상륙은 무혈상륙이었다. 처음 미군들은 “이거, 만우절로 일본군이 우리를 속이는 것 아니냐”고 기언가 미언가 했다. 상륙 첫날에 쓴 미군 포탄이 기록에 의하면 약 10만 발이라 하고, 일본군이 보유한 전체 포탄은 총 8천 발에 그치는 형편이었다. 해안에서 미군을 저지하면 일본군 진지가 노출되어 이오지마(硫黃島)에서처럼 큰 피해를 입어 지구전이 어려울 것을 염려해서 였건만, 일본 대본영(大本營)이나 심지어는 이 32군 작전참모도 처음에는 사령관에게 대들면서 돌격대결을 독촉하였다 한다.

  슈리성 구경을 마치고 첫날 오후는 오끼나와 중부 산악지대 분지에 위치한 식물농장을 가 보았다. 내게는 역시 농장내부보다는 이 산악지대를 휘둘러보는 것이 중요하였다. 이 산악지대에는 몇 군데 분지가 더 있었다. 일본군 작전참모가 하도 집요하고 강경하게 주장해 사령관이 그러면 이 분지에서 야간돌격전을 해 보라 했다가 미리 짜놓은 미군 탄막에 겹겹이 걸려 지하에서 뛰쳐나온 일본군이 거의 몰살당한 것이 4월 11일 밤이다. 하루 밤에 근 万 명이 죽었다. 그러고 나서야 작전참모가 고개를 숙였다 한다. 아, 저기 저기쯤이 되겠구나!

  고개 마루턱에 있는 호텔의 8층 방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진한 회색이다. 저 바다 멀찍이서 60년 전 그때 수 백 척의 대소 함정들이 여기를 향해서 대포를 쏘아댔거니 하는 생각도 스쳐 갔다.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있었다. 떠나오는 날이 新正 전날이긴 해도, 그리고 비록 서울은 영하였기는 해도 그래도 오끼나와이니 수영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는데, 이는 완전히 환상이 되고 말았다. 이곳에도 십여 년 만에 이상한파(異常寒波)가 몰아쳐 추웠다. 호텔에서는 저녁에 이곳 전통가무단을 불러 명절을 축하하는 무료공연을 로비에서 벌려 주었다. 여인 무용수들이 삿갓을 쓰고 전통예복을 입고 손에는 ‘똑! 똑!’ 소리를 내는 나무조각을 감추고 춤을 추었다. 남자 비파수(琵琶手)와 고수(鼓手)들은 노래도 하였다. 자정이 되니 서양식으로 축하 청주(淸酒)와 우동이 나왔다. 마음껏 마시라 했다. 이런 것은 우리나라 큰 호텔에서도 배워야 할 것이다.


     (3) 일본영화 ‘호타루’를 생각하며

  오끼나와 단체관광 둘째 날은 한 마리의 새우처럼 남북으로 길게 꼬기적 꼬여 있는 이 섬의 北部를 구경하게 되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國營오끼나와 記念公園 관광인데, 중북부 서쪽 해안에 세계제일의 蘭식물원과 해양수족관, 기막힌 인공모래사장을 만들어 놓은 곳이다. 북부는 덩치는 크지만 우리나라 강원도 같이 山의 연속이다. 도시와 큰 마을이 중부와 남부에 쏠려 있기에 이 북부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가는 길도 길고 멀고, 바다도 햇살이 좋아 깨끗하다. 어제 자정에 마신 청주 영향이 있는가, 끄덕끄덕 졸며 가는데 서쪽으로 육지에서 그리 멀지 않게 큰 섬 하나가 유달리 우뚝 솟아 나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저것이 이에지마(伊江島)로구나.

  오끼나와 상륙에서 미군은 이오지마(硫黃島)의 경험이 있어 온통 산악지대인 섬 북부에 일본군 주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여기 구니가시라(國頭)에 2개 사단을 배정했다 한다. 상륙 때 일본군이 대항을 않아서 슬그머니 주력수비를 중남부인 슈리(首里)지역에 둔 것이 감추어졌기에 그렇게 미군을 헛수고하게 만든 것이다. 북부에서 유일하게 전투다운 전투를 한 곳이 이 이에지마다. 이곳은 일본군이 당시로는 아시아에서 제일 큰 군용비행장을 만들려고 터를 닦아놓은 섬이라 여기에 미군 1개 사단이 상륙하여 보름동안 지키는 일군 3개 대대와 싸웠는데, 수비군을 몰살시키는 와중에서 미군은 부녀자도 섞여있는 일본 죽창부대를 처음으로 만났다 한다.

  오끼나와 기념공원의 아름다운 인공비치를 걸으면서 우리 관광단 일행은 초록색 산호초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설탕 같은 백사장에 환호를 한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오래 살아 하나 더 알고 있는 나는 서너 걸음 뒤에서 따라다니며 서쪽 먼 바다도 몰래 흘끔 흘끔 바라다본다, 저기, 저 멀리로 전쟁 당시 무수한 특공대 자살비행기가 떨어졌구나! 불현듯 몇 해 전 서울에서 상영되어 젊은이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던 일본영화 ‘호타루(반디불)’가 떠올랐다. 오끼나와 해전에서 특공대 조종사로 사라진 한국청년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인데, 한국인 가족으로 나온 배우들 일부가 한국인 배우라서 특히 인상에 남던 영화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특공부대 특별지정 식당이 있어 여기서 평소 애송이 비행사들이 밥을 대 먹고, 또 다음 날 출정하는 비행사들의 환송연이 부정기적으로 열린다. 그런데 어느 날 처음 배속되어 온 젊은이 하나가 한국출신임을 밝히면서 주인집 모녀와 친해지지만 그 또한 어느 저녁 환송식에 주인공의 하나로 나오게 된다. 유서를 쓰는 자, 울고 부는 자, 고함치는 자,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는 자, 세상을 원망하고 속았다고 땅을 치는 자가 있는데 이 한국인 청년은 마지막으로 아리랑을 부르고 떠나가면서 물건 하나를 맡긴다. 자기는 다음 세상에서 반딧불이 되어 여기를 다시 찾아오겠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을 하고 그는 갔다. 전쟁은 끝났고, 식당주인 모녀가 일본항복 소식을 듣던 날 저녁 이들은 반딧불 한 마리가 식당 문밖을 배회하는 것을 보고 반가워하고 슬퍼한다. 그리고 십 여 년이 흐르고 난 뒤 이 모녀는 우연히 과거 청년들을 가르쳤던 이 특공부대 장교를 만나고, 이들은 함께 그간 모녀가 지니고 있던 유물을 가지고 한국 안동 하회마을 청년 집으로 함께 찾아가 전하는데 이들이 들어가는 한옥 대문으로 웬 반딧불 한 마리가 따라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나도 이 영화를 보았고, 유물을 맞는 한국인 가족이 기품이 있게 나와서 영화의 뒷맛이 괜찮았던 기억이 있다.  

  일본군은 모두 3천 7백여 명의 특공대 전사자를 냈다. 놀랍게도 동경대학(東京大學)출신이 그중 5백 명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초기 세계최고의 전투기로 공인받던 레이센(零戰) 전투기에 250 킬로의 폭탄을 장착해 6천 메터 고공을 시속 6백 킬로로 날라 급강하 자폭하는 것이 통례였다. 일단 급강하가 걸리면 폭탄 무게 때문에 비행기 제어가 힘들었다 한다. 특공대가 처음 출현한 것이 1944년 10월의 필립핀 레이테(Leyte) 해전이었다. 우리 기억에 새삼 남는 개성출신 마쓰이 히데오(松井秀男) 고쬬(伍長)도 바로 이 레이테 해전에서 죽었다. 한국이름은 해방 후 金아무개라고 했는데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방 되던 해 겨울에는 그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오고 있다는 헛소문, 심지어는 방금 기차로 도착했다는 ‘후라이’까지 돌아서 우리 북촌동네 어린이들은 그를 보려 마라톤으로 서울驛까지 뛰어갔다 온 적이 있다.

  우리는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생으로, 모두가 학교에서 ‘호타루노 히까리 ...’하는 노래도 배웠다. 해방이 되니 우리 애국가를 처음에는 이 ‘호타루...’노래곡조에 맞춰 불러 어린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 적이 있다. 지금의 安益泰 작곡의 곡은 얼마 뒤에 나왔다. 여하간 이 영화 ‘호타루’의 주인공은 실제인물이다. 본명이 탁경현(卓庚鉉), 창씨 명 미츠야마 히로부미(光山博文)다. 경남 사천 사람으로, 京都약학전문학교 출신의 소위였다가 죽어 2계급 특진해 대위가 되었다. 특공대 지정식당 주인 모녀도 실제인물이다. 식당 이름은 토메야(富屋), 어머니 토리하마(鳥浜)부인, 딸 이름은 레이꼬(禮子)로 이들은 지금도 식당 이용자들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했다.

  작년에 이들을 가고시마縣 치란(知覽)으로 찾아가 만나고 와서 활자로 한 달 전에 알린 사람이 현 광운대학 일본학과 이향철(李香哲)교수다. 그곳이 과거 특공대 실제 주둔지였다 하며, 영화 ‘호타루’ 촬영지가 남아 있고, 거기에 특공평화회관(기념관)과 한국출신 명복을 비는 돌비석이 서 있다 하였다. 기록에 의하건대 한국출신 죽은 특공대원은 현재까지 도합 16 명이다. 그중 높은 계급은 崔貞根, 창씨 명 다끼야마 노보루(高山昇) 중위로서, 함경남도 출신인 그는 45년 4월 오끼나와 근해에서 죽어 소좌로 특진하였다. 李교수가 본 명단에는 경성법전(京城法專)과 연희전문(延專) 출신도 있더라 하였다.


  4) 마부니(摩文仁) 들판에 서서

  오끼나와 북부를 돌아보고 오는 길에 시골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벤또 정식이 나왔는데, 일본본토 음식처럼 담백하지가 않고 달고도 중국음식 티가 끼어 있었다. 日食, 中食, 太平洋式의 짬뽕이다. 고추장 생각이 났으나 일행 아무도 가져오지 않아 생각난다는 말도 못했다. 늙으면 온 욕심이 먹는 것으로만 가 이렇게 속으로 보채는구나 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젊어서는 몇 달을 우리음식 생각 없이 태평으로 지냈는데!

  늦은 저녁 호텔 방의 NHK TV에서는 일본열도가 20년 만의 강추위와 폭설이 내려 도시마다 교통이 마비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좀 지나니 新正 특집방송으로 일본식 ‘열린 무대’가 나온다. 갑자기 낯익은 노래가락이 흘러 나와 반갑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우리 어린이들이 일본아이들과 같이 나와 우리 동요 ‘고향의 봄’을 부르는 것이었다. 우리 말과 일본 말로 1,2절을 섞어 부르는데, 그중 합창단원들 반의 머리가 좌우로 까딱 까딱 하는 것을 보면 우리 어린이들임에 틀림없다. “후루사도(故鄕) 어쩧구, 후루사도 저쩧구...”라는 노래소리가 한동안 울렸다. 야, 이것 봐라, 세상이 변했나! 해병대 머리 노(盧)대통령과 사자(獅子)머리 고이즈미(小泉)총리가 제주도에서 서로 넥타이를 풀고 어울리면서 과거 묻지 않을 터이고, 다께지마 이야기 하지말자고 한 다음에 이상하게 일본에서 韓流가 불고, 욘사마를 찾고 하더니 이제 좀 두 나라가 가까워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다 그랬겠지만 우리 대통령이 ‘다께지마’라고 하여 자지러지게 놀라던 순간 여자 통역이 즉각 ‘독도’라고 번역해주어 나라 체면을 살렸던 일이 씁쓸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그때 그 고마운 통역이 이헌재 前부총리의 미국 고등교육 받은 딸이라 해서 한동안 화제였지.
  그런데 요즈음처럼 ‘독도’문제가 터질 줄은 그날 저녁 내 어찌 알았으랴!

  다음 날인 관광 셋째 날, 우리는 오끼나와 섬 南部를 돌아 볼 차례가 왔다. 남부는 높은 산이 없고 모두 서울 南山보다 좀 낮은 올망졸망한 작은 산이 군데군데 있는, 말하자면 반 평야지대였다. 먼저 간 곳이 민속촌이다. 뱀과 두꺼비가 생사를 건 싸움 구경이 하이라이트이니 놓지지 말라고 하면서 우선 종유동굴부터 보라는 것이다. 동굴 속을 들어가 보니 우리나라 강원도 정선의 석류굴 보다 작았다. 내 눈에는 기기묘묘한 종유석 보다는 오끼나와 전투 당시에 여기 숨어 있었을 일본군들이 모습이 상상되었다. 이 비슷하지만 이 보다는 작은 굴들이 산재해 있어 일본군 수 만 명이 몸을 숨겼을 것이다. 미군 상륙한지 한 달 뒤에 지하동굴에는 도합 万 명의 일본군 부상병이 있었다 한다. 요 모퉁이, 저 모퉁이에 누워 있었겠구나. 이런 상상을 하고나니 동물싸움 끝에 가서 두꺼비가 한 입에 뱀을 삼키고 만다는 징그러운 광경을 볼 생각이 없어졌다.

  오후는 대망하던 오끼나와 전적 국정공원(戰跡國定公園)이다. 그러나 일행은 시큰둥하다. 관광여행의 즐거움이 잠시 깨어지는 것 같아서 일 것이고, 태평양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라 그러려니 했다. 섬 남쪽 끝 비스듬히 경사 진 들판인 마부니(摩文仁)라는 곳인데, 일본손님을 태운 여러 대의 관광버스가 와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바로 이 마부니가 일본인들에게는 피 맺힌 곳, 오끼나와 수비군이 최후를 맞은 곳이어서 이다.
  공용주차장 바로 위 몇 발자국 가지 않아 깨끗하게 손을 본 한국출신 전몰자 위령 돌탑이 서 있었다. 접시를 뒤집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어머니 젖 같기도 한 모양의 돌탑으로, 큼직큼직하고 보기 좋은 돌들 수 천개를 한반도 각지에서 구해 와 둥글게 쌓은 것이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세웠다는 글이 새겨 있었다. 전쟁 당시 이 섬에는 약 万 명의 한반도출신 군인 군속 거류민이 있었다 한다. 징용이 대부분이었으나 군인으로도 꽤 많이 섞여 있었다고 일본기록은 말한다.

  미군 상륙 한 달을 버티던 일본군이 총공격에 나선 것이 5월 7일이었다. 이때는 큰 각오로 중포(重砲)도 굴에서 끌어내 포격전을 벌리면서 대낮에 여기저기서 부대가 돌격을 하였지만 곧바로 미군 탄막과 공중폭격으로 두어 시간 안에 기세가 꺾여 날이 저물기 전에 대패하고 말았다. 진지가 노출되어 더 이상 지탱이 어려워 사령부는 이 중남부 슈리(首里)에서 남단 마부니로 全軍을 옮겼다. 남은 장병 5만 명, 부상병 1만 명이 5월 한 달 싸우면서 옮겨갔기에 세가 줄어 마부니에서는 3만 명이 되었다. 이 언저리에 상대방 미군의 무서운 군단장 버크너(Buckner)중장이 최전방 시찰을 나왔다가 일본군 야포탄에 폭사하고만다.
 
  마부니로 옮긴 일본군은 거기서 다시 6월 한 달을 버텼다. 이 와중인 6월 18일, 해병대 새 부대 시찰을 나온 김에 관측소에 올라갔다 내려온는 공격군인 미군 사령관인 버크너(Simon Bolivar Buckner)중장 머리 위로 일본군 야포탄이 터져 파편을 가슴에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며칠 뒤 일본군은 마부니 들판에서 언덕 너머 마부니 마을을 향해 마지막 반자이 총돌격을 감행하여 몰살되고 말았다. 바닷가 벼랑  가까이 몰렸던 일본군이 돌격하는 시간에 맞추어 우시지마(牛島)사령관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지휘본부 동굴 입구에서 참모장과 함께 할복자살을 하였다.  참모장이 자기가 먼저 가서 안내하겠다 하는 것을 사령관이 "그래도 내가 먼저"라고 하며 꿇어앉아 단도를 자기 배에 꽂는 순간 뒤에 기다리던 검도 유단자인 부관 대위가 삽시간에 목을 베어 놓더라 한다. 지켜보던 참모들 가운데 뜨밖에 경리부장인 대좌와 아래 과장인 소좌가 말려도 듣지않고 권총자살을 하였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이를 따라 휘하 지휘관들도 일부는 자기 동굴에서 같은 방식으로 자결하고, 일부는 부하들과 함께 돌격하다 전사하는 쪽을 택하더라 하였다.

  운신을 못하는 부상병들에게는 수류탄 한 덩이씩을 주면서 알아서 살아남던지 자유에 맡겼는데, 거의 모두가 홀가분해 하면서 터트려 죽더라 하였다. 군인들에 묻혀서 그곳까지 따라왔던 민간인들 상당수와 일부 생존군인들도 문자 그대로 마부니 들판 끝 벼랑에 몰려 미군이 말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투신자살을 하였다 한다. 1945년 6월 23일 이었다. 사이판에서도, 여기 오끼나와에서도 민간인 부녀자가 아이들을 먼저 떠다밀고 자기도 뒤따라 투신자살했던 것은 ‘가슴팍은 물론 배와 등에도 털이 숭숭 난 짐승 같은 미군들에 잡히면 노리개가 되어 온갖 수모를 당하다가 죽는다’는 세뇌교육이 먹혀들어서, 그리고 포탄 속에 주야로 노출되어 제 정신이 아니어서 이다.
사후 우시지마 중장은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5) 자살벼랑을 바라보며

  이렇게 오끼나와 전투는 석 달을 끌었다. 이오지마 전투가 한 달에 마무리 된 것에 비하면 엄청난 성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으로서는 본토 결전을 준비를 할 시간을 그만큼 번 셈이다. 그런데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 산발적 전투를 벌였거나 두더지 생활을 지속해 온 부대도 두 개 있었다. 근 3천 명이 일본 항복 보름 뒤에 우연히 물 뜨러 나온 병사 하나가 잡히는 바람에 싱겁게 손을 들고 나오는 꼴이 되었다. 이들은 항복 소식은 물론 마지막 돌격명령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들판이었다. 언덕 꼭대기는 잘 다듬은 나무숲이 바다 바람을 타고 산들거리고 있고, 언덕 중간에는 흰색 단층으로 바다를 향해 일자형으로 팔을 벌린 형태의 평화기원관  건물이 있어 당시의 전흔(戰痕)을 지닌 유물과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에 가까운 언덕 아래턱에는 전사자 묘지가 넓게 깔려 있었다. 푸른 잔디, 흰 화강암 벽과 보도에다 진한 흙색 대리석 비석 2만 여 개가 태풍이나 바다 바람을 고려해서 낮으막하게 설계되어 서 있었다. 미군을 위시한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의 연합국측 묘지와 일본군 묘지가 서로 나누어 있었다. 중앙에 멈추지 않는 추모 불꽃 대신 멈추지 않는 분수가 낮으막히 뿜어대고 있다. 비슷하게 해안가에 있는 노르만디(Normandy) 미군묘지는 아름답고 청아하지만 이 마부니 묘지를 보니 이 보다는 격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노르만디 전몰장병 묘지는 일부러 해안과 묘지 사이에 키 큰 나무들을 여러 겹으로 쫙 심어놓아 묘지에서는 바다경치를 볼 수 없었다. 규모도 작았다. 마부니 쪽에 묻힌 영혼들이 더 좋은 경관과 더 신선한 바다 바람을 쐴 수 있다는 美學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전쟁 때에는 일본군 소속이었던 한국인들 묘지는 한국정부 요청으로 연합국 측 영역에 들어가 있었다. 3백여 개였는데, 확인된 한국인 수가 그것뿐이어서 그렇다 한다. 훨씬 더 많을 터인데, 기록상 처음부터 한국이름으로 되어 있던가, 아니면 창씨 이름에다 원 한국이름도 같이 등록된 사람들 유해만 모았다 한다. 오래 국교가 없고, 왕래도 없었던 데다 한반도에 사는 가족마저 와서 찾아 낼 엄두를 내지 못하여서 그리 된 것이 아니지 않을까. 이제는 더욱 세대가 바뀌었으니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돌이켜 보건대, 해방 전 징병과 징용 나간 남자들은 거의 다 미혼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피하려고 해방 1년 전부터 서둘러 早婚을 하였다. 외아들인 내 외숙도 그해 봄 지방 고등보통학교(高普)를 졸업하자마자 십대 말인데도 벼락결혼을 하고 그 지방 무슨 공공사업장에 말단으로 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렇더라도 기혼청년 소수는 주로 농촌에서 어쩔 수 없이 뽑혀 징용을 나가기는 했으나 대개는 북해도나 사하린, 또는 일본 본토 내 탄광에 배정되었던 것으로 안다. 사하린 동포 가운데 이런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노후 한국의 옛 아내를 찾아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운 나쁜 청년들이었다. 이제 오끼나와 한국인 전쟁사망자들은 그들 자손이 없어서도 더 이상 찾아내고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도 만약 경우를 위해 한국인 무덤자리는 넉넉히 비어 놓고 있었다.
 

  마부니 들판 바닷가에 쭉 나무의자가 있는 곳이 있어 가 본다. 앉아 본다. 젊은 일행은 희희낙락 사진을 찍는다. 슬그머니 아래를 보니 낭떠러지가 아닌가. 아, 여기 이 의자 아래와 저 바다 사이 어디엔가 동굴 입구들이 있을 것인데, 워낙 거의 직각으로 된 벼랑이라 굽어보기가 힘들었다. 그 중 한 두 동굴이 우시지마를 위시한 일군 고급장교들이 최후를 맞은 곳이려니 가늠해본다. 저쪽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명한 자살벼랑(suicide cliff)이 보였다. 칠팔십 미터 높이는 족히 될 상 싶었다. 아래는 검은 색 날카로운 바위들이 널려 있다.

  이 자살벼랑을 보니 사이판(Saipan) 생각이 났다. 거기도 실은 몇 해 전 新正연휴에 여름이 그리워서 갔었다. 현지 사이판 태생 남태평양인 남자가 모는 지프를 타고 뱅뱅 산을 돌아 이 섬 중앙에 홀로 우뚝 솟은 3천 4백 미터 타포차우山 꼭대기에 오르니 섬 동서남북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나는 거기서 북쪽 언덕과 들판을 보며 밀리던 일본 육군 제31군이 고전하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섬 북단은 동서가 좁은데다 언덕이 바다를 향해 급경사라서 마지막 반자이 돌격 후의 일부 생존 일군이 굴러 떨어지듯 내려왔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 보다 두 해 전 하와이 기습공격을 주도한 연합함대 제1기동함대 사령장관 나구모(南雲)중장이 그 후 미드웨이 패전의 죄책감 때문에 우울증에 빠진 채 한직인 중부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사이판에 있다가 이 섬 최고위 장성이라는 책임을 지고 전투 마지막 날인 1943년 7월 7일에 일본식 할복자결을 한 반 바위동굴, 그리고 그 유명한 자살벼랑도 보았다. 그 벼랑은 오끼나와 자살벼랑보다 더 높고, 더 험악하고, 더 웅장하고, 아래 바위들도 더 험하고, 수심은 더 깊다. 사이판 주위가 세계에서 수심이 제일 깊은 1만 5천 미터 해구(海溝)라서 내가 본 바다는 거칠고 무섭게 검푸르렀다. 그러니 사이판 자살벼랑은 남성적인 반면 오끼나와 벼랑은 상대적으로 여성적이라 하겠다.

 
       (6) 女中生 위령탑을 스쳐가며

  時代에 따라 오끼나와 관광안내도 주안점을 두는 방향이 다른 모양이다. 오끼나와가 미국관할 아래에 있던 시대에는 일본인 관광단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다 미국인들만이 이 섬에 왔을 터이다. 일본인들은 와도 눈치가 보여 그냥 볼 일만 보았지, 전적지 관광이란 말은 꺼내기 힘들었을 터이고. 후에 주민투표로 오끼나와 통치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나서야 일이 풀렸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곳 관광은 이미 세월이 많이 흘러 관심이 있는 층이 다 늙어버렸고, 전반적으로 반일감정이 있어 일본군 전적(戰跡) 위주로 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렇다고 이제 일본영토로 복귀한 곳에서 한국관광단을 미군 전적에 맞추어 안내할 수도 없을 것이다. 또 기본적으로 우리 관광단 數가 많지 않다. 그래서 그저 풍광과 문물, 오락 위주로 짜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관광안내자도 말을 아꼈다. 이 마부니 들판의 내력은 말해주지 않고, 다만 전쟁 때 죽은 한국인 위령탑과 합동묘지가 있는 경치 좋은 공원이라고만 한 후 한국인 위령탑만 안내하고 자유시간을 짧게 주었다. 나 같이 늙어 과거사를 좀 아는 사람만이 알아서 보는 관광인 것이다.

  마부니에서 버스에 올라타니 서울에서 함께 온 한국인 인솔자가 “오늘 시간이 좀 있어 원래 계획에는 없지만 보너스로 옛 일본해군사령부 지하벙커 관광을 시켜드리겠다”는 반가운 말을 한다. 이게 웬 떡! 실은 그날 아침 호텔로비에 꽂혀 있는 안내 팜프렛 하나가 눈에 띠어 관광버스에 오르기 전 나는 이 인솔자에게 ‘내일 오후 자유시간을 나하(那覇)시내에서 가질 때, 그곳에서 개인적으로 옛 일본해군사령부 지하벙커를 택시타고 다녀 올만한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가능하리라는 대답이어서 나는 내일 그러리라고 마음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느닷없이 척 인심을 써주니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나를 전쟁 당시의 일본해군병사로 알고 이러나?’라는 자격지심도 들어 유리창에 몰래 내 얼굴을 비쳐 본다.

  버스가 출발하고 몇 분이 되지 않았는데 “창으로만 보세요. 오른쪽 길 저 위에 보이는 것이 일본 女中生 위령탑(慰靈塔)인 ‘히메유리(山丹)의 탑’입니다”라는 안내자의 말이 나왔다. 과연 멀찍이 거므스름한 탑이 보였다. 일본인 참배객들이 꾸역꾸역 그 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다. 거의 다 여자다. 격전 당시 임시 간호병으로 3월 말인 졸업식 날 식이 끝나자마자 집단 차출되었던 오끼나와 5개 여자 중학 졸업생과 한 학년 아래 학생들 5백 여 명이 일본군을 따라 남쪽 끝 마부니 지구로 옮겨가면서 半이 죽고, 마지막으로 포위당해 탈출이 불가능해진 여자사범학교와 제1고녀 학생 수 십 명이 인솔교사 셋과 교복으로 갈아입고 수류탄으로 자폭한 자리에 세운 탑이다. 여자교사들이 후세를 위해 편지를 그 자리에서 써서 남긴 것이 뒤에 발견되었다 한다. 전쟁이라 졸업을 원래보다 한 학년 앞당겨 하던 시절이라 지금 학제로는 高1, 中3 생들이다.

  어린 처녀들이 간호병으로 전쟁에 나왔던 것이 이때만이 아니다. 육이오 때 보니 인민군 간호병도 그 또래가 압도적이었다. 그 해 서울이 점령당한 7월 초, 여군 모자, 가슴 아래를 두른 가죽 띠, 왼쪽 엉덩이에 찬 가죽가방, 스커트 등의 모습으로 재동, 안국동 네거리를 꼭 둘 씩 짝을 지어 활보하던 인민군 간호병들이 지금도 내 눈에는 선하다. 敵治 당시 원남동 서울대학교병원은 인민군 장교 병원, 현 보안사령부 자리의 제2부속병원(옛 京醫專병원)은 인민군 하사관 전용병원, 서대문의 적십자병원과 서소문의 경전(京電)병원(현 한일병원)은 일반병사용 병원 같은 군병원으로 전용되어서 이 일대에 인민군 간호병들 왕래가 잦았다.

  잠시 위령탑 골목 어귀에 섰다가 떠나는 버스 안에서 나는 당시의 우리를 회상해본다. 그 해 4월 새 학년이 시작되자 우리 초등학교 저(低)학년생들은 학교에서 부상당한 사람을 위하여 붕대 감는 법, ‘아까징끼(빨간 약)’을 어떻게 발라야 적게 쓰고 유효하게 쓰느냐를 배웠다. 여자 상급생들은 골절 부상자들 팔다리에 부목(副木)을 대는 법과 머리 싸매는 법 같은 한 수 위 것들을 배웠고, 졸업해서 비상시에 정신대(挺身隊)에 나가면 무전을 칠 수 있어야 한다며 무전기술을 배웠다. 연필을 거꾸로 잡고 나무 책상 위 공책받침에다 일본어 ‘아 이 우 에 오’에 상응하는 부호를 치는 훈련시간이 끼어들어 시험도 보았다. 여자들은 쉬는 시간에도 “쯔 쯔 또 쯔쯔 또또또...”하면서 시험 때 야단을 맞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까딱 까딱 훈련시켰다. 당시에 말하던 정신대는 요즈음 잘못 알고 말하는 군 위안부가 아니라  일선부대와 후방부대에서 무전치고, 간호보조하고, 경리를 보는 등의 오늘 날의 여군(女軍)이나 여자 군속이 하는 일을 맡게 되는 것으로 알았다. 일부 일본여자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그런 군속으로 나가고 있었다. 우리 골목 용철(容喆)이네 누나는 재동초등학교 졸업한 뒤 중학교를 못가고 있다가 그 전 해 가을에 정신대에 뽑혀 나갔다. 그녀는 해방 몇 달 후에 돌아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자 고(高)학년생들은 부상자 실은 들것 나르는 훈련, 목총 메고 제식훈련, 땅바닥을 기는 훈련을 받았다. 작년에 급히 만든 학교 수영장에는 물을 봄부터 채워 놓고 해군 수병으로 가면 필요하다 해서 4학년 이상 남학생들에게 수영을 강제로 가르쳤다. 바다, 격침, 상어 밥이 연상되어 선배들은 수영 배우기를 겁냈다.

  아, ‘호안뎅(奉安殿)’이라는 조그마한 탑도 생각이 난다. 학교 정문 근처 운동장 한쪽에  서 있는 어른 키보다 조금 높은 돌탑인데, 그 상단부 사각형 함 속에 일황, 황후의 사진과 교육칙어가 들어 있다 했다. 입학 당시에는 없다가 해방되기 한 해 전에 세웠는데, 일본에서는 탑 아닌 작은 교내 건물을 그렇게 이름 부쳐 놓았다고 한다. 학생들은 아침저녁 등하교 때는 반드시 여기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규칙이었다. 아침 조회 때도 교장선생에게 인사하기 전에 먼저 이 호안뎅을 향하여 인사를 하였다. 해방 후 가을에도 그 탑은 그대로 있었다. 무슨 귀신이라도 그 함 속에 있는 기분이라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 선배들 여럿이 용기를 내어 열어보는 현장에 우연히 나도 끼었는데, 열고 보니 인쇄된 낡은 종이 한 장이 나왔다. 한문이 많아 읽지를 못해 그대로 넣었는데, 그것이 교육칙서였던 것 같다. 사진이 없던 것으로 보아 지금 생각하니 미리 남모르게 일본인 교장이 정리한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하루 한 개씩 배급 나오는 앙꼬 없는 큰 빵을 받아먹었다. 그 해 일본 임금 생일(天長節이라 했다)에는 전 해 보다 나오는 과자 양이 적었다. 모리나가(森永) 캬라메루 두 갑이 한 갑으로 줄었고, 찹쌀모찌 열 개가 아니라 ‘기비당고’ 다섯 개 짜리 한 줄이 나왔다. 집에 와서 두 동생들에게 캬라메루 두 개씩, 기비당고 하나씩을 나누어 주고 나머지를 챙기고 있는데 급기야 어머니도 참지 못하고 “야, 나도 하나 먹자!”면서 미루꾸를 빼가셨다. 그 해도 4월 말에 원족(遠足, 소풍)은 갔다. 멀리는 가지 못하고, 재동학교 뒷산인 북악산 정상을 넘어 지금의 삼청각(三淸閣) 자리 근처로 2,3학년생이 갔다. 나는 할아버지가 드실 어제 저녁과 오늘아침 식사를 한데 모아 약소한 벤또를 싸 갔다. 할아버지는 어제부터 배가 아프다고 하시며 이럴 때는 속을 비는 것이 제일이라고 집을 나서는 내게 한 마디 하셨다. 쌀도, 밥도 궁핍하기가 이를 데 없던 시절이었다. 하늘에는 며칠에 한번씩 B-29가 지나가는 판이라 담임선생이 수시로 오락가락하며 산에서도 한데 모여들 있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7)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으면 뒤에 그 사람은 우울증, 깜짝깜짝 놀람, 쉽게 오는 흥분, 그때 그 광경이 눈앞에서 다시 벌어지는 것 같은 환영, 맨 정신과 혼미상태를 오락가락하는 괴이한 심리, 불면증을 겪는 일이 잦다. 그래서 이를 의사들은 스트레스后 정신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병명을 부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전쟁터에서 격전을 많이 겪은 사람에게서 보는데, 여기서는 자기만 살아남았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survival guilt)까지 작용해 심한 우울증을 일으켜 자살할 위험이 있다. 나는 대학에서 학생이나 젊은 의사들에게 이 병을 설명할 때 늘 단편소설 하나를 들었다.

  1951년도 일본 아꾸다가와(芥川)문학상 수상작인 기꾸무라 이다로(菊村到)의 단편소설 ‘이오지마(硫黃島)’는 이런 이야기다.  

  1951년 4월 어느 저녁, 東京의 한 신문사로 사나이 하나가 찾아와 기자를 찾는다. 허름한 양복, 몹시 나쁜 안색, 표정이 무딘 얼굴, 망설임조의 조용한 목소리, 다소 막히는 말문으로 느릿느릿 이어가는 말씨, 얕은 재주를 모르는 그의 처세관을 정직히 표현하는 듯한 오랜 망설임 뒤의 대화가 이 사나이의 특색이었다. 전에는 깡통공장 공원이었다는 이 사나이, 가다끼리 마사도시(片桐正俊)는 일본군 海兵團에 입대해 이오지마 수비대의 일원으로 있다가 1944년 이오지마 공방전에서 우군 2만 여 명이 거의 전멸하는 마당에 끝까지 살아남은 소수의 패잔병이 되어 귀환한 처지라 했다.

  총포와 화염방사기 세례 속에서 이들 소수는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동굴에서 동굴로 옮겨다니는 두더지 생활을 하였다. 한번은 새 동굴을 찾은 것을 알리려 급히 와 보니 짧은 시간 사이에 먼저 동굴은 미군 화염방사기 세례를 받아 까맣게 탄 동료들 시체가 나둥그러져 있기도 하였다. 널려 있는 일본군 시체와 자연 속에서, 그리고 밤마다 불야성 축제분위기인 미군진지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는 굶주림 속에서 어느덧 세월이 지났고, 마지막 남은 전우 하나와 같이 숲을 나와 미군에게 발견되고 구출된 것이 전쟁이 끝나고 3년 뒤, 그리고 그는 귀국하였다. 그는 섬 생활 중에서도 늘 日記를 써 오다가 동굴을 나오면서 묻고 왔는데, 이번에 미군사령부의 특별허락을 받아 그 일기를 찾으러 간다 하였다. 그의 희망은 그런 사실을 신문기사화해 달라는 것이었다. 일주일 뒤 그 사나이가 재차 신문사를 찾아 왔을 때는 그 이야기가 막 신문기사로 찍혀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사나이가 이오지마 방문을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지 보름이 되어 그 記者는 놀란다. 바로 그 사나이가 미군 한명을 대동하고 이오지마에 가서 찾으려던 일기장을 찾지 못하고, 별안간 수년 전의 격전 터 수리바찌山에서 만세를 절규하면서 절벽 아래로 투신자살하였다는 신문기사를 읽고서이다. 기자는 흥미를 느껴 죽은 사람에 대한 취재에 나선다. 먼저 만난 사람은 그 사나이의 직속상관이었던 구 일본군 소위였다. 소위 역시 이 부하에게서 비슷한 인사편지를 받았다 하면서 ‘일기 찾는 일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아마 그는 이오지마에서의 자기 처세에 관해 그 어떤 결말을 지으려고 섬에 간 것이 아닐까, 그가 한때 섬에 가려다가 망설이면서 신문이 그의 이야기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가지 않았으리라’고 하였다.

  기자가 다음에 만난 사람은 죽은 사나이와 함께 이오지마에서 4년을 지내다가 구출된 전우였다. 요리집 주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전우는 사나이가 전우 둘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했다. 배가 고파 동굴을 빠져나와 미군이 버린 깡통을 먹다가 부비트랩에 걸린 그를 구하기 위해 뛰쳐나오던 어린 일등수병이 미군 총에 맞아 괴로워하면서 그에게 수류탄을 간청해 자폭해버리고만 것이 첫째 사건이었다. 다른 하나는 목이 마른 주인공이 죽어 넘어진 일군 시체에서 수통을 빼내어 마시려던 찰라 그 죽어가던 시체가 사력을 다 해 물통을 되찾으려해 기겁을 한 주인공이 저도 모르게 그 시체를 메다꽂아 마지막 숨을 거두게 했다는 사건이었다.

  기자가 세 번째 만난 사람은 얼마 전까지 사나이와 연애하던 간호원이다. 사나이가 지나가다 차에 치이게 된 아이 하나를 몸을 날려 구하고 다리를 다친 일이 있어 그 다리 치료에서 둘이 만나 결혼도 약속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절교를 선언하더라 하였다. “전쟁이 그를 망쳤어요. 자기 혼자서 전쟁의 보상을 하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그 분은 자기 일신만의 행복을 견뎌내기가 힘들었겠지요.”라는 말을 간호원이 하였다.

  기자가 끝으로 만난 사람은 직장동료 제판공이다. 간호원의 오빠가 이오지마에서 전사한 것을 알고 주인공 사나이는 자기가 죽인 군인이 그 오라비가 아닐까 괴로워했다는 것이고, 그래서 한 사람을 죽인 것은 백 사람을 죽인 것과 같다는 논리를 펴더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이오지마에 간 것은 자살하려고 간 것이겠지요?”라는 기자의 말에 이 청년은 거세게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그는 다시 시작하려고 간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서부터 자기 인생을 새롭게 살아보려고, 그런 힘을 자기 내부에 불어넣기 위해 간 것이지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

  以上이 단편의 줄거리다.
 
  이렇듯 살아남은 뒤의 죄책감은 때로 심각하다. 물론 이런 심리반응이 일본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군대나 다 있다. 그리고 군대 말고도 소방수나 기타 특공대원에게도 있는데, 학문적인 연구는 월남전 귀환 후 정신이상을 일으킨 미군장병의 정신과치료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상념에 사로 잡혀 있는 사이에 나를 태운 관광버스는 어느 덧 옛 일본해군사령부호(舊日本海軍司令部壕)가 있는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8) 도요미구스꾸(豊見城) 언덕 地下벙커에서

  오끼나와(沖繩) 전투는 미국 상륙군 25만과 일본 수비군 17만이 꼬박 석 달 반을 벌린 싸움이다. 나눠준 안내쪽지를 보니 미군은 1만 2천 명이 전사했고, 일본군은 15만 명이 전사했다고 나와 있다. 이외에 오끼나와 민간인도 3만 7천이 그 사이에서 죽었다.

  옛 일본해군사령부 지하벙커(舊日本海軍司令部壕)는 나하(那覇)市 바로 남쪽 근교에 있는 도요미구스꾸(豊見城)라는, 이름으로 보아서는 城이지만 단순한 지명인, 마을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하市 공영시외버스터미날에서 시외버스로 25분 정도, 나하 국제공항에서 택시로 20분 거리다. 알고 보면 찾아가기도 쉽다. 원래 오끼나와 전투 한 해 전에 만든 것으로, 시멘트와 갱목을 썼다. 전후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한참이 지난 다음 몇 번에 나누어 조금씩 도합 2천 4백 여구의 유해를 거두었다 하였다. 관광개발 목적으로 지금처럼 복원시킨 것이 1970년이다. 全長 450 미터 가운데 현재는 300 미터만 공개하고 있다.

  사령관 오오다 미노루(大田實) 해군소장은 육군의 우시지마 중장의 지휘 하에 있었지만 조금 더 오래 전부터 있어서 섬 주민과 더 가까웠다. 전투 초기 일본 해군은 육전대(陸戰隊, 해병대) 3천 여 명을 포함해 약 万명의 병력이었는데, 군함 타는 순수 수병들은 소총도 부족해 그 반수가 죽창으로 무장했었다 한다. 전투 두 달 만에 미군이 일본 육군과 해군 사이로 쐐기를 박고 들어와 해군은 수비 주력인 육군에서 고립되었는데, 한때 이 지하 벙커에는 해군 약 4천 명이 있었다 한다. 무기가 없던 이들은 주로 야간 육탄공격으로 미군에 대항하였다.

  오오다 소장은 6월 초 해군성 차관 앞으로 보낸 마지막 작별전문에서 ‘현지사(縣知事)는 통신력(通信力)이 없어졌고 육군도 통신력에 여력이 없어 제가 보고합니다....주민들이 그간 혼신을 다 하여 군을 도왔고, 같이 싸웠으니 후세(後世)에 꼭 이 점을 특별배려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하여 현지에서 더 추앙을 받고 있다. 실은 전투 전 해인 1944년 여름, 사이판이 떨어지자 오끼나와에서는 우선 어린이들만이라도 본토로 소개(疎開)시키려고  규우슈(九州)로 수 백 명을 태워 보내던 일본객선 쓰지마마루(對馬丸)가 미국 잠수함 어뢰를 맞아 침몰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 현지 해군으로서는 자책과 주민에 대해 미안한 심정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정부도, 전사작가(戰史作家)들도 이 문구를 강조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내 추측이다. 그러니 해군사령관의 이 문장 하나 추가로 일본은 20년 뒤 잃을 지도 모를 이 섬을 주민투표로 되찾게 될 계기를 만드는 폭이었다고 본다.
  오오다 소장은 육군 우시지마 중장에게 6월 12일, ‘적 전차가 아군 사령부 동굴을 공격중임. 본 수비대는 어제 밤 옥쇄함. 종전의 후의에 감사하며 귀군의 건투를 기원함.’이라는 마지막 전문을 보낸 후 다음 날 이른 새벽 지하벙커 사령관실에서 권총자살 하였다.

  언덕 마루에 새로 지은 지하벙커 관광센터인 단층건물이 서 있다. 들어가니 큰 홀 하나가 있고, 그 곳에 옛 전투 사진, 폐허가 된 당시 시가지 정경, 군인 옷과 무장, 소지품 등이 진열되어 있다. 옥상에 조망대가 있는데, 나만 올라갔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로 서쪽 바다가 보인다. 당시에는 그리로 미군 육해공용 상륙주정(LVT) 탱크가 백 여 대 올라와 막판의 일본군을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공격하였다. 내려와 일층 한 구석에 간다. 지하로 들어가는 경사가 비스듬한 긴 계단이 나 있고, 이를 따라 약 30 미터 깊이로 들어가니 길이 수평으로 사방으로 뻗혀 있는 벙커 복도가 있다. 이 통로가 옛날 입구였다 한다. 당시와 같은 희미한 조명등이 드믄 드믄 걸려 있는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작전실(作戰室)에 이어 막료실(幕僚室)이 나오는데, 벽에는 막료들이 수류탄 자결할 때에 튄 파편 자욱이 잔뜩 널려 있다. 사령관실에는 모조품 나무 책상과 의자가 있다. 가장 처참한 곳이 하사관실로, 여기는 당시의 상항을 그린 모형조각들이 사람 크기로 재현되어 있고, 실제 자결 때의 수류탄 파편 자욱이 벽을 꽉 채우고 있었다. 한 그룹이 자결하면 다음 그룹이 또 죽고 해서 파편 자욱이 벽을 도배하듯 널린 것이다. 의무실도 있고, 발전실(發電室)도 있었다. 벙커의 출구도 보였는데, 그 주위에 병사들이 모여 있다가 우루루 적을 공격하러 나가던 그 낡은 철문이 지금은 안에서 걸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음산하였다. 내 주위 일본사람들도 그렇게 느꼈던지 어깨를 잔득 움추린 채 발걸음이 재다.

  벙커를 나오니 다른 일행은 벌서 언덕을 내려가 저만큼에 앉아 있다. 그들은 별 재미나 흥미를 느끼지 못한 듯 하였다. 다소 신기한 것을 보았다는 정도였다. 아, 이제야 알겠다, 왜 그런지를 ! 벙커 복도와 여러 종류의 방 안내표시판이나 안내문이 모두 漢字위주 日語여서 사람들이 읽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동아시아 半장님 한글세대가 겪는 손해 현장이다. 우리 안내자도 안내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단순히 ‘옛날 일본해군이 파 놓은 지하 동굴’ 이라는 정도로만 이야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긴 말을 한다면 쓸데없이 구설수에 오를까 그랬을 것이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민망하지만 이곳은 나를 위한 호사(?)관광코스였던 것이다.


     (9) 반전(反轉)을 거듭한 벚꽃의 운명

  호텔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나는 그 해 봄 서울을 회상하였다.

  그 해 3월 초의 미군기 東京대공습은 시가지 초토화 작전이라 불 잘 타라고 소이탄(燒夷彈)을 야간에 쏟아 부었기에 하루 밤 사이에 목조건물의 도시가 거의 다 타 버렸다. 이공계(理工系)여서 학병 끌려 나가는 것을 보류 받던 나머지 한국유학생들은 이때 묵던 하숙집이 불 타버리는 바람에 숙소도, 밥도 없어져 삼삼오오 한반도 고향을 찾아 돌아왔다. 운 나쁜 일부는 타고 오던 관부(關釜)연락선이 미국 잠수함 어뢰에 맞아 배와 함께 대마해협으로 가라앉아버리는 경우도 있어 거기서도 목숨을 운에 걸었다. 당시 한국 남해안과 대마해협에서는 대소 화물선과 객선이 그렇게 침몰 당한 경우가 많았다. “어이구, 폭격 무서워 혼났어요!”라던 어느 아저씨 얼굴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래도 그 해 봄에 창경원 사꾸라(벚꽃)는 보러 갔다. ‘요(夜)사꾸라’는 등화관제에다 전기 절약으로 전등불을 못 켜서 그 전 해부터 없어졌고, 낮에만 문을 열었다. 시민을 위한 유일한 공원 구실을 하던 곳이 이 창경원이어서, 남녀가 연애거는 장소로도 한 몫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일요일 오후에 갔는데, 구경나온 사람들이 과거보다 퍽 줄었다. 연못 위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우동을 사 먹었는데, 식량사정으로 우동 양이 몇 가락밖에 없었고, 그나마 아버지는 어른이라고 먹을 자격이 없다 해서 나 혼자만 먹었다. 국물과 다마네기(양파)로 양을 채우느라 코를 그릇 속에 박다시피 훌쩍거리고 먹어 양파의 단맛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운 좋게 배를 반 채웠던 것이다. 배를 채우는 방법이 또 하나가 있었다. 북악산 중턱에 대공포를 설치하려고 새로 만든 상하 두 개의 ‘히라바(廣場)’ 사이에 아카시아가 많이 폈는데, 동네아이들과 거기 가서 그 아카시아 꽃잎을 따 먹는 것이었다.

  해방이 되자 이제는 애국단체와 언론이 들고 일어나 창경원 벚꽃나무를 비어버리자는 운동을 벌렸다. 벚꽃나무는 일본인이 좋아하는 나무이고, 활짝 피었다가 단숨에 지는 꽃이라 섬나라 사람들의 단기(短氣, 냄비기질)를 너무도 잘 상징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반면 우리 무궁화는 오래 오래 핀다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고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다. ‘무궁화가 벚꽃보다 좋은 이유는?’ 이라는 시험문제도 초등하교 고학년에서 여러 번 나온 적이 있다. 결국 창경원 벚나무는 모조리 비이게 되었는데, 반대하면 매국노로 몰렸다. 그래도 창경원 관리자들이 다 비어버린다면 너무 삭막한 경치가 걱정이 되니 사이사이에 몇 그루는 남겨두자는 절충안을 내어 채택되기는 했다. 비운 다음의 봄에도 나는 창경원에 갔었는데, 거의 맨 벌판이었다. 그늘이 없으니 앉기도 고역이다. 처음에는 친일파로 지탄을 받을까봐 서로 눈치를 보며 앉지 않으려던 사람들이 누가 하나 이 몇 안남은 벚꽃나무 그늘아래에 앉자 왁 하고 달려들어 자리차지 경쟁이 벌어지곤 했다. 다닥다닥 여러 단위가족들이 등을 마주 대고 붙어 앉아 음식을 먹는 바람에 소풍분위기가 잘 나지 않았다.
  지금은 서울 국회의사당 둘레, 진해 해군기지, 상도동 국립묘지가 온통 벚꽃 명소가 되었고, 反日이 보통이 아닌 북한에도 금강산 벚꽃 길이 있음이 오늘 이 게시판에도 올라와 있을 만큼 세상이 변하였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당시의 일본은 오끼나와 다음의 미군 상륙지점을 남 규슈(南 九州)로 보았다. 한편에서는 가능성은 이 보다 적지만 미군이 일단 제주도를 점령한 다음 거기서 北 九州로 치고 들어 올 것으로 생각했다. 한반도 수비는 ‘게쓰고(決号)작전 제7호’라는 이름으로 관동군 산하 육군 제14 방면군(方面軍)이 맡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반도에서 인력을 동원하여 총력을 다 해 그 해 봄, 제주도 한라산에 굴을 팠다. 유사시 몇 개 사단 병력과 가미가제 특공기가 숨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어마어마한 굴을 팠다. 이 한라산 굴 속에서 뒤에 일본군이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간 소총들이 많이 나와 제주도 4.3사태 때 사용되었다고 들었다. 서울에서도 길을 넓히고 굴을 팠다. 재동골목은 원래 그리 넓지 않았는데, 골목어귀 공중목욕탕 ‘파湯’을 허물면서 지금의 넓이로 넓혔다. 집을 헐어 화동, 재동, 계동, 원서동을 서로 연결하는 큰 길을 새로 만들었다. 북촌마을 낮은 산이나 높은 언덕에도 굴을 비밀리에 팠다. 팠던 인부들은 인근 교외에서 동원되어 왔기 때문에 막상 굴 근처에 사는 동네사람들은 굴 지리를 몰랐다. 대신 북촌 젊은이들은 김포비행장을 닦는 데에 동원되었다. 노량진에서 영등포로 가는 電車는 태평양전쟁이 나고 두 어 해 후에 생겼다. 당시의 노량진은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다. 큰 길도 그때 닦았는데, 어쩌다 도락꾸(트럭)가 지나가면 먼지가 풀풀 났다. 원래 계획은 왕복 두 줄 전차 길이었는데, 무기 만드는 데에 쓴다 하여 선로 한 줄이 깎인 외줄로 시작했다가 오끼나와 전투가 있던 무렵에 김포비행장 노력동원 남자 중학생과 초등학교 6학년생들을 나르느라고 급히 두 줄로 보강하였다. 영등포에 내려서도 작업 터까지는 다시 30里를 걷는다 했지만, 거기서는 간식으로 ‘감빵’ 한 봉지씩을 주어 집에 남아 있는 식구들 몰래 먹고 온다고 싫지 않은 눈치들이었다. 

  학교에서는 우리들에게 ‘소까이(疎開)’를 권장하였다. 서울이 폭격을 당할지 모르니 시골에 아는 사람이 살면 그리로 잠시 가 있다가 소집하면 오라고 하였다. 소까이는 5월 초부터 말이 나왔고, 한 달이 지나니 학급의 반이 줄었고 우리는 합반(合班)을 하였다. 그리고 나도 6월 중순 서울을 떠나 지방 외가 집으로 갔다.

  해방이 되니 그 해 겨울부터 미국공보원에서 전쟁기록영화를 배급해주기 시작하였다. 나는 친구들과 본정통 3정목(本町通 三町目, 그때는 아직 충무로란 새 이름으로 바뀌기 전이었고, 몇 街라는 말도 없었다)의 조그만 극장이나 종로 우미관에 가서 ‘타라와 상륙작전’, ‘오끼나와 상륙작전’, ‘레이테 海戰’, ‘가달카날 전투’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보았다.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아 초등학생들을 영화관에서 붙잡지 않았다. 더구나 버젓이 小人用 입장권을 팔았다. 영화는 미국 전함들의 어마어마한 함포사격, 뿜어대는 화염방사기와 숯덩이가 된 일본군 시체들, 벌거벗다시피 남루한 복장으로 두 손을 들고 나오는 일본군 포로들, 자살벼랑에서 뛰어내리는 사이판 섬의 민간부녀자들, 급강하하는 가미가제 특공기를 향해 올라가는 미군 함정들의 탄막과 드디어 맞고 “에앵...”하고 바다에 떨어지는 특공기들, 폐허의 일본 도시들과 길에서 무언지를 주어먹는 아이들이 나오는 장면의 연속으로 시간 내내 총포소리에 귀가 째어졌다.
 
  이들 기록영화는 재미가 있다기보다 무서웠다는 것이 바른 말이겠다. 또 갑자기 세상이 바뀌니 가치관에 혼동이 와서 우리 아이들은 영화를 보면서 어안이 벙벙하기고 하고, 머쓱 하기도 하고, 박수를 쳐야 할지 아니면 눈물을 흘려야 할지를 분간하지 못했다. 한 두 학년 위 상급생이 “우와 !”하면 나도 “우와 !”했다. 서양사람에게 익숙할 리가 없던 당시로서는 그저 털 많이 난 서양사람 군인들이 야속하다거나 무섭다는 인상이 우리 꼬마들에게 심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미군들은 거리에 별로 나와 다니지 않았다. 해방 때까지 우리가 가까이에서 본 서양사람이라고는 서대문 영천에 살면서 일본 무 장아찌 반찬을 리야까에 싣고 아코데옹을 키며 시내 골목을 누비던 흰 수염이 길게 난 백계 러시아 할아버지 한 사람 만이었다. 그는 이따금 갑자기 “땃 !”하는 소리를 내며 차렷 자세를 취해 별명이 ‘땃 할아버지’이었다.  이 양반, 그 후에 어찌 되었는지?

(끝)


말세이유에서 오끼나와까지 (5) -  조두영